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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임경순/정보화시대의 A양과 P양

입력 | 1999-04-15 19:46:00


올해 들어 전국을 강타한 소위 ‘A양의 비디오’ 파문은 디지털 복제가 지닌 엄청난 파괴력과 인터넷이 발휘하는 놀라운 정보 파급 효과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정보화 시대에 사는 우리가 사생활 침해에 얼마나 속수무책인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였다.

◇사생활 침해 속수무책

A양의 비디오처럼 극히 사적인 정보에 대한 무차별 공개와 게릴라식 유포 행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공범 역할을 했다. 본인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주소 없는 게시판’ 혹은 ‘익명방’에서 교환된 정보가 PC통신 게시판, 불법 제작 CD롬, 사설 BBS를 통해 가히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인터넷 뉴스 그룹과 심지어 학문 연구를 목적으로 설치된 대학의 FTP 사이트를 통해서도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밤새도록 수백 메가바이트의 동영상 자료를 다운 받는 사람들이 폭증하는 바람에 관련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는 소문이 난 인터넷 사이트는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간에 여지없이 통신이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과거에는 주로 아날로그 방식의 비디오 테이프로 음란물이 퍼졌기 때문에 복제를 할수록 화질이나 음질이 떨어졌다. 따라서 그 전파와 확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는 이런 기술적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버렸다. 원판의 상태가 양호하기만 하면 화질이나 음질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거의 무제한으로 양질의 복제가 가능하다.

미국에서도 육체파 여배우 파밀라 앤더슨 리가 신혼 여행 때 정사 장면을 찍은 ‘P양의 비디오’가 유출돼 인터넷의 유료 사이트에서 유통되면서 1천억원대의 엄청난 규모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에서도 타인의 사생활을 불법적으로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혼이 기승을 부렸다. A양의 비디오도 국내의 경제 규모를 감안한다면 P양의 비디오에 못지않은 음성적 부가가치를 창출했을 것이다.

인터넷은 본시 핵전쟁에 대비해 개발된 고도 정보통신 기술의 산물이다. 핵전쟁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기지가 파괴되더라도 단 하나의 기지만 살아남아 있으면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도록 개발한 네트워크가 바로 인터넷의 원조인 아르파넷이었다. 이런 완벽한 분산적 네트워크로 출발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정보화 시대가 고도화할수록 이런 고도의 기술적 장비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정보화 윤리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컴퓨터 통신망에서는 익명의 이름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신분이 잘 노출되지 않아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발언을 거리낌없이 양산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따라 개인에 대한 중상 비방, 개인 비밀의 무차별 공개 등 정보화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생활 침해가 이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비공개 게시판에 있는 자료를 버젓이 공개 게시판에 올리는 행위가 자행돼 곤혹을 치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A양의 비디오를 비롯해 ‘몰래 카메라’로 촬영한 다른 사람의 사생활 정보를 유포하는 데 일조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컴퓨터 통신망에 침입해 사생활 정보를 빼내는 해커를 정보 공유와 전자민주주의 구현에 앞장서는 컴퓨터 시대의 영웅으로 치부하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이같은 세태가 정보화 시대의 윤리 부재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윤리부재 현상 우려

냉전 시대에 나타난 핵무기 경쟁의 부산물로 얻어진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은 자칫 잘못 활용되면 핵전쟁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인류를 몰아갈 수도 있다.

윤리 부재와 타락으로 멸망한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정보화 시대의 윤리 부재 및 무감각증으로 인해 인류가 회복불능한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임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