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경영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20일 국무회의 발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국무회의 직후 박지원(朴智元)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발언이 몰고올 파장을 의식한 듯 “사기업에 대한 간섭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주문했으나 재계 일각 등에서 “대통령 말씀은 법 위에 있느냐”는 비판의 소리가 터져나온다.
비판의 논지(論旨)는 간단하다. 공기업적 성격이 강하기는 하지만 대한항공은 어디까지나 사기업인데 아무리 대통령이라고해도 경영체제를 바꾸라 말라 할 수 있느냐는 논리다. 즉 경영권 포기문제는 원칙적으로 해당기업의 주주와 이사회, 고객의 이탈여부로 결정할 사항이며 실정법의 테두리 내에서 다뤄야 할 사안이라는 얘기다.이에 대한 박수석의 해명성 반론은 21일에도 이어졌다. “세칭 족벌경영 자체가 좋다 나쁘다하는 게 아니다. 대를 이어 경영하는 회사 중에도 잘하는 회사가 많다. 다만 중요한 국가적 기업이 국민과 전 세계인의 안전을 위해 경영을 잘 하느냐를 평가하자는 것이다. 대한항공의 국제적 신뢰추락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대한항공 문제는 국가적 문제다.”
양측의 주장을 놓고 칼로 무 베듯 옳고 그름을 가리기는 힘들다. 반드시 박수석의 해명이나 외신보도가 아니더라도 사안의 중요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논란의 소지가 있음을 모를 리 없는 대통령이 오죽 답답하고 심각함을 느꼈으면 그런 강단(剛斷)을 내렸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대통령이 꼭 그런 접근방식을 택했어야 했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대통령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마디 한마디가 국정운영의 금과옥조가 되고, 민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다시 거두어들이기도 힘들다. 그래서 제아무리 해박한 식견과 출중한 언변을 지닌 대통령이라도 참모진의 치밀한 보좌를 받는 등 말의 ‘적의성(適宜性)’을 잃지 않기 위한 배려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20일 국무회의 발언도 그렇지만, 김대통령이 취임 이후 이런 저런 공개석상에서 한 얘기 중 적의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것은 한번 짚고 넘어갈만한 일이다. 특히 식견과 언변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정평이 난 대통령이기에 혹,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이를테면 지난해 어느 자리에서 자신의 비서실장을 ‘권력 2인자’로 일컬은 사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뒷말이 따른다. 지역편중 인사라는 비판에 대한 반론을 강하게 전개하느라 경북출신인 비서실장을 2인자로 부각시킨 ‘충정(衷情)’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법치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력현실적 접근방식을 내보인 것은 누가 뭐래도 적의성을 잃은 처사다. ‘2인자’ 운운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걸맞느냐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법치의 테두리라면 마땅히 ‘2인자’는 국회의장(국가공식서열)이나 국무총리(정부공식서열)라야 옳다. 더구나 김대통령은 취임 초기, 말그대로 비서실의 ‘비서기능’을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건 ‘충정’보다 ‘법치’나 ‘적의성’을 먼저 염두에 두고 배려하는 자세다. 그리고 때로는 해법제시는 아래에 맡기고 의제를 설정하는 정도에서 얘기를 끝내는 ‘여백(餘白)의 정치’가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다. 대한항공의 경우도 반드시 대통령이 논란의 한복판에 서지 않더라도 똑같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이도성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