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의 족벌 경영 체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발언에 재계는 일단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사기업의 일에 어떻게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있느냐는 재계의 반발은 일단 일리가 있다.
대통령 자신의 시장주의 원칙을 스스로 뒤집는 발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점들을 감안하고라도 재벌 총수의 ‘절대 무한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란 점에서는 재벌들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외국언론은 한국의 재벌 총수를 흔히 ‘군주’에 비유한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습되고 회사에서 신처럼 받들어진다는 점을 빗댄 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 총수들은 군주 이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조선시대 왕들은 무리한 지시를 내리면 신하들로부터 빗발치는 상소와 고언(苦言)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재벌그룹에선 총수의 말은 ‘신성불가침’의 파워를 지닌다. 아무리 총수가 잘못하고 있다는 게 명백해도 이를 지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재벌들이 말하는 ‘시장주의’도 총수에 대해서만은 무력하다. 총수들은 사실상 ‘시장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선진국의 ‘시장’은 최고경영자가 잘못하면 이를 응징하고 물러나게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례를 아직 보지 못했다.취미를 살린다며 막대한 신규사업에 과오투자해 수천명 직원들의 생계를 불안하게 만들었어도 총수의 입에서 사과 한마디 들을 수 없다.
오직 회사를 거덜내고 파산할 때에야 물러날 뿐이다. 총수에 대해서는 특히 ‘경영실책〓책임’이라는 시장 메커니즘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얘기다.
기업인들은 흔히 공무원들을 ‘철밥통’이라 부른다. 공직사회 개혁과정에서 공무원들이 보인 자세를 보면 수긍이 가지만 ‘철밥통’이라는 말이 과연 이들에게만 해당될까 싶다.
이명재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