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 칙칙함의 내력에 대해 가끔 물어온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과 최인훈의 ‘광장’이 애독되던 ‘긴급조치 시대’엔 그 칙칙함의 정서가 꽤 어울렸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학가에 아직 ‘창백한 지식인’의 상이 조금은 허용돼 있었던 게다.
5·18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평탄했을 것이다. 재주에 비해 인생이 불편키로 이름난 ‘58년 개띠’인 나는 졸업을 불과 1년 앞두고 5·18을 만났다. 그 격렬함에 어울리지 않게도 나는 다시 애잔한 가락과 노래말을 엮어 ‘오월의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광주’회상 TV 다큐멘터리에 가끔 배경음악으로 쓰이는데 유독 목이 메는 장면에 등장하지만 난 그게 별로 싫지 않다.
5·18은 평범한 모범생으로 자란 나를 과격하게 만들었다. 모친 말씀마따나 이미 ‘애브노멀(Abnormal)’이었던 나는 직업적 문화운동에 투신했고 따라서 실업자 생활을 시작했다. 과격한 심사를 털어 ‘이 산하에’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압제’ ‘피’ ‘죽음’ 등 온갖 과격한 말이 다 들어있어 당시 ‘과격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내가 속칭 ‘노래운동’ 울타리 안에서 힘깨나 쓰는 인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 덕택이다. 86년 봄 한 교회에서 전태일추모행사가 열렸고 나는 ‘노래모임 새벽’을 이끌고 ‘불꽃’이라 이름붙인 조그만 노래극 공연을 치렀다. 공연은 대실패로 끝났지만 전태일의 죽음에 실린 이 노래는 살아남아 이른바 ‘히트곡’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그 애잔한 서정을 지우지 않았다.
87년에 쓴 ‘사계’는 그 오밀조밀함 때문에 나이어린 여공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뜻밖에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음반을 밀리언셀러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덕분에 나를 ‘흥행거리’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90년대 초 노래가 점점 더 단순과격해지던 시기에 거꾸로 민중운동의 와해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역설인지 필연인지…. 처자식을 합쳐 셋을 거느린 30대 중반의 늙은 학생이었던 나는 다시 마피아와 혹한의 땅 모스크바에서 힘겨운 3년을 보냈다. 생전 처음 겪는 고강도 교육이 쓸개를 씹는 일과 같았지만 그저 ‘필요 때문에 썼던’ 80년대, 내 능력의 저편에 있었던 ‘우리 음악’의 길이 내 앞에도 서서히 열리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파리에서 보낸 2년간, 문화와 정신의 생산자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향기넘치는 인간환경을 겪으면서 ‘쓰고싶어 쓰는’ 음악이 내 일상의 일부로 되었다.
귀국, 선거와 정권교체, 교수 취임, 난생 처음 받은 월급봉투와 부모님 내의, 얼떨결에 해치운 두 개의 영화음악(여고괴담, 닥터K) 등으로 1년을 보내고 나는 지금 정말로 오랜만의 한가로움 속에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고전문학과 지적 유산을 존경하고 로맨틱한 정서를 좋아하는, 누가 뭐래도 70년대 세대였다. 하지만 나의 노래를 사랑해준 것은 80년대를 대학에서 보낸 이른바 386세대. 나는 나의 조국을 부패와 무능, 불신과 문화적 천민성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세력으로서 늘 386과 475 두 세대를 꼽는다.
지금은 잠잠한 일상 속의 그들, 늘 내 꿈과 사색의 원천이었던 그들을 언젠가 좋은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글쎄, 그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으되 이번엔 짤막한 노래보다 세시간짜리 오페라를 선사하고 싶다.
문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