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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선]칠레의 와인맛과 피노체트논쟁

입력 | 1999-04-27 19:05:00


칠레의 와인은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 있다. 칠레인들은 접붙이지 않은 포도로 만든 순수한 와인은 칠레산 뿐이라고 자랑한다. 다른 나라의 포도나무는 진드기에 대한 면역성을 얻기 위해 다른 종끼리 접붙이기를 한다. 칠레는 연간 5억병의 포도주를 만들고 3억병을 수출한다.

19세기말 유럽은 포도나무의 뿌리를 갉아먹는 ‘포도 진드기’의 출현으로 최악의 농업재해를 겪었다. 일자리를 잃은 와인 종사자들은 대거 남미로 이주했다. 이들이 각자 가져온 포도나무 뿌리가 지금 칠레 와인 산업의 근간이자 시조가 된 셈이다. 기후조건과 전국토에 걸쳐 발달된 구릉성 산지도 포도농사에 적합하다.

전 세계를 휩쓸던 ‘포도 진드기’가 칠레에는 왜 범접하지 못했을까. 동쪽으로는 해발 6천m가 넘은 27개의 고봉이 우뚝 선 안데스산맥이 있다. 북쪽으로는 과거 남미의 인디언들도 자리잡지 못할 정도로 척박한 아타카마사막이 펼쳐진다. 이와 함께 남쪽의 남극의 빙하, 서쪽의 태평양이 칠레를 둘러싸고 방패막이를 한다. 그래서 칠레는 ‘천연의 요새국가’‘남미의 섬’으로 불린다.

요즘 칠레인들은 어디서나 햇 포도로 담근 와인을 마시면서 피노체트 전 대통령이 영국에서 체포된 사건을 화제로 삼는다. 98년 10월 피노체트가 요양차 영국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가 살인 및 고문 등의 죄목으로 영국정부에 범인인도 요청을 하면서 늙은 독재자의 시련이 시작됐다. 그는 73∼89년 대통령을 지내면서 비밀경찰 조직과 정보기관 등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집권 16년간 약 2천4백명이 실종됐다.

영국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피노체트는 스페인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물론 재판에서 유죄를 받더라도 고령(83세)으로 수감생활이 힘들겠지만 국제인권사에 남는 기념비적 사건이 될 것이다.

칠레인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70년 세계 최초로 ‘진정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으로 기뻐했던 것도 잠시. 아옌데 정부의 실정으로 칠레 경제가 피폐해지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돈이 있어도 빵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은 피노체트의 개발독재를 필요악으로 평가했다. 피노체트는 공포의 독재정치를 펴면서도 국제기구 보고서에서 늘 한국보다 국가 경쟁력이 높게 나올 정도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또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공무원 부정이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보수계층은 국가적 자존심을 건드린 스페인과 영국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보수우익 야당연합과 중도좌익 여권연합은 피노체트 사건을 표로 연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가진 자’와 기득권층은 피노체트에 우호적이고 ‘없는 자’들은 적대적이다.

최근 스페인 전력회사인 엔데사가 칠레 최대의 전력회사에 80% 이상의 지분을 투자하는 15억달러 규모의 계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스페인 자본에 대한 칠레 주주들의 보이콧이나 반대 여론은 거의 없다. 한국과 비슷한 정치역정을 겪었으면서도 ‘경제는 경제’라는 자세를 유지하는 칠레인들에게서 성숙한 시민의식을 느낄 수 있다.

적절한 일조량으로 올해 칠레의 포도농사는 풍년을 기록했다. 달콤하게 숙성되고 있는 칠레의 와인. 객지에서 말년의 풍상을 겪고 있는 피노체트에게 가장 그리운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길한 (삼성물산 산티아고지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