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계 건축자재 업체인 라파즈는 지난해 11월 동부한농과 벽산의 석고보드 사업부를 인수한 뒤 라파즈코리아의 초대사장에 동부한농의 이창명(李昌明·46)기획담당이사를 임명했다.
피인수 기업의 이사를 과감히 사장으로 발탁한 라파즈측은 “인수협상 과정에서 이사장이 보여준 뛰어난 판단력과 협상능력을 높게 샀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건설업계의 특성상 해당 시장의 상황을 잘 꿰고 있는 사람이 경영의 최적임자라는 판단도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라파즈는 한국지사의 공동사장으로 본사의 다니엘 쿨롱을 임명했지만 쿨롱사장은 기술개발에만 전념하고 전체 경영은 이사장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라파즈의 경우처럼 국내기업을 인수한 뒤 자사의 최고경영자를 파견하지 않고 피인수기업의 경영진에 경영을 맡기는 외국기업들이 많다. 이른바 ‘소유는 소유, 경영은 경영’이라는 논리에 따른 것. ‘내 편 네 편’ 가릴 것 없이 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에게 대표를 맡긴다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다.
업계에서는 “국내기업들이 외국기업과 인수 합작 협상을 벌일 때 경영권 확보에 집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평가한다. 이와 함께 “소유주가 바뀌면 최고경영자뿐만 아니라 전체 임원진을 물갈이하는 국내기업들이 외국기업들의 냉철한 판단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많다.
지난해 7월 흥농종묘를 인수한 멕시코계 다국적 종묘업체 새미니스도 흥농종묘의 조대현(曺大鉉·54)사장에게 경영을 맡기면서 임직원을 전혀 교체하지 않았다. 당시 내한한 새미니스의 고위책임자는 “한국시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직접 경영을 하겠느냐”고 배경을 설명했다.
새미니스측은 1년에 한두번 가량 아태지역 담당임원을 한국에 파견해 그동안의 경영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전부. 박종엽홍보팀장은 “새미니스는 전세계 지사의 경영을 한국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에게 맡긴다”고 전했다. 본사와 지사는 인터넷을 통해 수시로 의견 교환을 하기 때문에 업무상 혼선이 빚어지는 일은 전혀 없다고 박팀장은 덧붙였다.
이처럼 피인수기업 출신으로 인수기업의 대표가 된 인물들에게는 대체로 ‘될만한 사람이 됐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97년말 탠덤컴퓨터를 인수한 컴팩컴퓨터가 한국컴팩의 사장으로 탠덤측 경영자인 강성욱(姜聲郁·38)사장을 임명한 것도 강사장이 컴퓨터업계에서 촉망받는 경영자로 꼽혔기 때문.
강사장은 84년 한국IBM에 입사,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90년부터 7년간 탠덤컴퓨터 동아시아 본부 대표이사를 지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15년여를 컴퓨터업계에서만 활동한 셈. 92,93년 연속으로 탠덤컴퓨터의 최우수 영업상인 ‘퍼스트 캐빈상’을 수상, 마케팅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컴팩 관계자는 “시장과 기술이 급속도로 변하는 컴퓨터업계에서 경영자가 갖춰야할 가장 큰 덕목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발빠른 경영”이라며 “그런 점에서 강사장이 가장 적임으로 꼽혔다”고 설명했다.
컴팩 본사의 판단은 맞아 떨어졌다. 강사장이 경영권을 맡은 한국컴팩은 지난해 컴퓨터업계가 급격한 내수 감축으로 고전을 겪는 중에도 4분기 매출을 전년 동기 대비 110%로 끌어올렸고 올 1분기도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0%이상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