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4일이었다. 처음 딴지일보를 인터넷에 띄운 것이. 첫날 방문자 수를 가리키는 카운터의 수는 정확히 1백이었다. 그 중 98번은 발행인이 분주히 왔다갔다 하며 올린 숫자였다. 나머지 두 번은 도대체 누구였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우발적 키보드 사고가 아니었을까. 딴지일보 조회수가 1천만을 돌파하는 날, 첫날 방문했던 두 사람을 찾는 이벤트 한 번 해볼까 한다. 그 다음 날도 조회수는 정확히 1백회. 이번엔 전부 발행인이 들락날락한 거였다.
애초 개인 홈페이지에 불과했기에 방문객 수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으니 어쨌든 심심했다. 게시판에 “참 재밌군요!!” “넵,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글을 혼자 썼다 지웠다 했을 정도로. 그러다 야후코리아의 서핑팀장 앞으로 메일 한 장을 보냈다.
“임명장…. 귀하를 본지의 제1호 홍보담당 임원으로 직권에 의거 낙하산 임명함. 반항은 금물이며… 어쩌고 저쩌고…. ―딴지그룹 발행인.”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서핑팀장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물론 극도로 훌륭하기 그지없는 민족정론 딴지일보의 거부할 수 없는 요청에 ‘우수 사이트’로 추천한 것이긴 하겠지만…. 야후코리아의 서핑팀장께 딴지일보를 우수 사이트로 추천해 준 점, 이 기회를 빌려 감사드린다. 딴지일보의 초기 하루 방문객 1천여명은 순전히 야후코리아 덕분이다.
몇 개월간 발행인 집무실이었던 안방 구석에서 그룹총수 발행인 편집장 취재기자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윤전기사 청소부를 혼자 하다보니 힘에 겨웠다. 1차 기자단을 모집하자 1천명 이상이 지원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해외의 교포와 유학생들이 대거 지원을 했다는 점이다. 얼마 전 2차 모집에서는 수천명이 지원했다.
딴지일보 고유의 ‘퍼스트 멜 퍼스트 찜’(먼저 메일을 보내 지원한 사람이 먼저 뽑힘)시스템에 의해 기자 선발을 했다. 이제 딴지일보의 사이버 기자단은 전세계 20여개국 1백여명에 이른다. 수습기자 명예기자 예비특파원 임원과 자문위원까지 합하면 수백 명이다. 방문객 수는 8백만명을 넘었고.
임명과 동시에 모든 권리는 딴지일보가 접수하고 오로지 충성의무만 달랑 남는 불평등 계약에다 불시 정리해고와 강제 명퇴가 난무하며 땡전 한푼 보수도 없는 열악한 근무조건이다. 그렇지만 딴지일보의 사이버기자단은 여느 제도권 언론의 기자들 부럽지 않은 열의와 창조성을 갖추고 있다. 가끔 ‘데모쿠라시!’를 외치며 반기를 드는 소수 극렬 체제전복 세력의 쿠데타가 있긴 하지만….
사이버 매체를 창간하고 인터넷으로 배포하고 전세계를 아우르는 기자단을 구축하는 이 모든 작업이 컴퓨터 한 대면 충분했다.
작은 잡지 하나를 창간하려 해도 상당한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지만 이제 더이상은 아니다. 언론의 권력화로 인한 폐해를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 소수에 의해 독점된 거대한 제도언론은 일반 시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대안매체들에 의해 권력분점될 것이며 끊임없이 감시받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발언대를 가질 수 있는 개인매체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딴지일보는 그 작은 실험이다. 딴지기자단과 독자들에게 실험으로만 끝내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꾸벅.
김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