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 잠잠해지더니 한마디 중얼거렸다.
근사한데….
자아, 박 형 훅 하구 불어 봐.
박은 멍하니 불빛을 들여다보았다. 명순이가 재촉했다.
뭘해 얼른 불라니까.
그가 훅 하고 촛불을 불었고 방은 어두워졌다. 우리는 박수를 쳤다. 그렇지만 생일 축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모두들 갑자기 각자의 생각을 따라서 어디론가로 가버린 듯했다. 순옥이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불이 나가니까 시골에 간 거 같애.
명순이도 한마디.
그래, 나두 동생들 생각했어.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살 더 먹었군.
그는 자기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것처럼 이어서 내뱉었다.
야 얼른 불 켜. 술 먹게.
명순이가 케이크를 잘랐고 우리는 곧장 소주를 땄다. 취기가 오르자 넷은 차례로 노래 한 자리씩을 부르다가 나중에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뽕짝 합창으로 넘어갔다. 명순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순옥이도 덩달아 찔끔거리고 박은 공연히 술잔을 상에다 내리박으며 화를 냈고 나는 상 머리에서 모으로 넘어져서 잠들었다. 새벽에 깨어 보니 이불 깃에서 화장품 냄새가 났고 바로 옆의 지척에서 여자가 분명한 누군가가 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내가 뒤척이자 순옥이가 잠에서 깼는지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서는 아랫집에 갔어요.
아, 네….
나는 골이 뻐개지는 듯했고 속이 쓰려서 냉수를 마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그 뒤부터 박은 순옥이와 내가 부부라도 된 것처럼 놀려댔다. 내가 아무 일 없었다고 항의하는 것 자체가 쑥스러운 일이라 나는 그저 모자라게 허허 웃어줄 따름이었다. 박은 순옥에게도 농을 했다.
동침한 서방님께 그러면 쓰나.
그 다음 주던가, 나는 건이에게 약속대로 전화를 했고 최동우 즉 한일군과의 약속 시간을 받았다. 공장 일이 끝나고 나서 저녁도 먹지않고 그와 헤어지던 성당으로 찾아갔다. 안양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의 북쪽으로 갔으니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길이었다. 나는 종로에서 버스를 갈아탔고 성당에서 한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갔다. 미행이 없는가 살피느라고 횡단보도를 두 번이나 건넜다. 성당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신문을 사들고 보도에 서서 성당 입구를 한 오분쯤 관찰하고나서 차도를 건너갔다. 우리에게는 옛날 식의 조직 레포가 없었으므로 서로 주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뒤뜰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둠 속에 우리가 앉았던 벤치가 보였다. 나는 맨 뒤편의 벤치에 가서 앞을 향하고 앉았다. 벽 모퉁이의 그늘 속에서 동우가 재빨리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지금 오니?
하고 나는 말했다. 동우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잘 지내지?
음, 살만해. 넌 어떠니?
재미있게 지낸다.
동우가 말했다.
지난번에 일본의 석준이에게서 인편으로 소식이 왔어. 책 몇 권하구 편지가 왔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