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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강정규/소곤소곤 동화읽는 가정을

입력 | 1999-05-03 20:03:00


매년 5월 첫 주 일요일에는 신천 강씨(信川 康氏) 문중의 날 행사가 고향의 선산 밑 큰 소나무 아래서 개최된다. 행사라지만 뿔뿔이 흩어져 살던 출향인사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한 자리에 모여 조상의 묘역을 돌아보거나 환담을 나누다가 점심 한 끼 먹고 각자의 삶터로 돌아올 뿐이다. 그러나 이 일로 얻은 결과는 적지않다. 타관살이에 협력할 갖가지 정보도 얻지만, 그 중에서도 같은 항렬의 신생아 동명이인이 속출하던 사건이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금년에는 거기 참석할 수 없었다. 미카엘 엔데의 ‘모모’이야기에 나오는 시간 도둑이라도 침범했는지, 도시인의 생활이라는 게 늘상 바쁘지만 그날은 마침 제자의 결혼식 주례가 선약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운 할머니의 얘기

충무로의 행복웨딩홀을 나와 전동차를 탔다. 붐비던 승객이 환승역에서 우르르 빠져나가자 건너쪽에 앉은 정장차림의 30대 엄마와 네댓살배기 사내아이, 그리고 보퉁이를 껴안은 시골풍의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가 발장난 치는 아이를 귀여운듯 자주 돌아보는 눈치더니 보퉁이를 풀고 그 속에서 쑥개떡 한 덩이를 꺼내 내밀었다. 아이가 할머니의 행색을 살피다가 엄마와 쑥떡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테 안경을 낀 엄마의 눈길 또한 할머니의 행색을 더듬다가 아이의 시선과 마주치고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종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이가 쑥떡을 건네받고 엄마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이번에는 먹으라는 손시늉을 했다. 아이가 다시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할머니는 막무가내로 다그치는 시늉을 했다.

아까부터 승객들의 눈길은 거기에 쏠려 있었다. 긴장감이 흐르고 시치미를 떼고 있던 엄마가 드디어 화장지를 꺼내주면서 고개를 좀 크게 끄덕였다. 아이가 쑥떡을 입으로 가져감과 동시에 승객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터널을 빠져나온 전동차 안, 하얀 스타킹에 검정 가죽구두를 신은 아이의 두 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릴 적 고향집에는 오영수의 ‘화산댁이’에 나오는 주인공과 닮은 할머니가 계셨다. 거기엔 쑥개떡이 있고 옛날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집 사랑방엔 할아버지와 함께 ‘명심보감’이 있었고 회초리도 있었다. 거기에는 길쌈과 장담그기와 냇둑의 염소도 있었다. 썰매와 연을 만드는데 겪어야 할 과정이 있었다. 관계와 교훈이 있었다.

지금 우리들의 아이들에겐 우선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할머니가 안계시고, 계시더라도 따로 살거나 노인정에 가 계신다. 이야기와 함께 꿈과 환상이 사라지고, 회초리와 함께 교훈이 사라지고, 관계와 과정이 무시된채 차가운 결과물만을 향유하며 그것을 문화로 착각한다.

◇ 상상의 날개 펴게해야

집에 돌아와 잠시 쉬는데 관리사무소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아파트 정문 앞에 생선차가 왔습니다. 제철 만난 꽃게와 알이 밴 조기도 있습니다.” 오늘 저녁 단지내의 수백가구 식탁에는 같은 재료, 같은 방법, 똑같은 맛으로 조리된 꽃게탕과 조기구이가 오를 것이다. 학교와 두세군데 학원을 다녀온 아이와 젊은 부부는 식사 후 차를 마시고 ‘왕과 비’를 보거나 또 다른 연속극을 보고, 1층부터 15층까지 층층이 누워 잠이 들 것이다. 남의 손으로 지은 집에서, 남의 손으로 재배 가공된 음식을 먹고, 남의 손으로 지어진 옷을 세탁기로 빨아 입으며 갖가지 문명의 이기들을 활용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

엄마의 이야기와 학교에서 배우는 시와 동화는 프랑스 아이들에게 교육의 첫걸음이 된다고 한다. 말썽 피운 아이에게 “넌 오늘 저녁 동화를 읽어주지 않을 거야!”라는 엄마 말씀이야말로 가장 심하고 슬픈 벌이 된다. 전후 일본의 어머니들도 아이가 잠들기 전 10분여 동안 동화를 읽어주는 운동을 폈다. 그렇게 자란 어린이들이 오늘의 문화대국 경제대국을 세운 것이다.아이들에게 시와 동화를 들려주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자. 연필을 손수 깎아 쓰게 하고, 제방 청소는 물론 설거지도 시키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꿈을 갖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자.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무엇보다 과정을 몸소 겪게 하자. 우리네 모두 ‘시와 동화가 있는 집’을 만들자.

강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