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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이 뛴다 ②]「텔레마케터」 8개월째 유을미씨

입력 | 1999-05-09 20:02:00


취업 8개월째인 주부 유을미(柳乙美·44)씨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다.전화를 받을 때 상대가 누구든 항상 ‘―님’자를 붙인다. 상대방이 딸 뻘 되는 나이라도 ‘고객님’으로 공손히 응대한다. 심지어 회사 이름을 말할 때도 ‘회사께서’라고 할 정도.

유씨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 넥셀텔레콤의 전화 판촉요원, 이른바 ‘텔레마케터’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전화하는 걸로 시간을 보낸다. 신변 잡담으로 수다를 떠는 게 아니라 처음 대하는 고객에게 상품(호주 국제전화 할인카드)을 팔아야 하는 만만찮은 일이다.

전업주부 유씨가 텔레마케터로 나선 건 지난해 5월. 남편이 하던 수입화장품 회사가 IMF로 된서리를 맞으면서였다. 중산층이라고 자부한 여유있는 가계가 힘들어지면서 유씨는 취업을 결심했다.

“사실 전부터 일자리를 갖고 싶었는데 애들 키우느라 여유가 없었어요. 어찌보면 경제난이 저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됐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40대 중반의 주부를 반기는 일자리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해하던 유씨는 어느날 일간지에서 텔레마케터 무료교육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텔레마케터 양성 보급기관인 G&G(02―4767―005)에서 30시간 강습 후 취업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응모한 유씨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 지금의 직장에서 일하게 됐다.

오전 9시20분경 사무실로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목소리 가다듬기. 입을 크게 벌려 “아―에―이―오―우―” 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입 주변 근육을 풀어준다. 따뜻한 물과 목캔디를 준비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준비운동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저녁때 목이 칼칼하고 잠겨서 다음날 일하는데 지장을 받아요.”

대화 할 때도 목에 힘을 주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말한다.

유씨는 아침마다 1백여개의 전화번호를 지급받는다. 이름도 나이도 없이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 있는 ‘고객 리스트’이다.

1백통 가량 전화를 걸면 통화성공률은 70회 정도.

상대방에게 먼저 전화를 받을 수 있는지, 바쁘지 않은지 양해를 구한 다음 용건을 꺼낸다. 바쁘다고 하면 “다음에 하겠다”면서 끊어야 한다. 입으로는 얘기를 하면서 손으로는 꼼꼼하게 메모한다. “(제품구입을) 생각해보겠다”는 고객은 ‘가망고객’으로 분류, 다음에 전화를 걸어 구입의사를 한번 더 확인한다.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안내장을 보내고, 도착할 때 쯤 다시 전화를 건다.

이제는 상대방의 목소리만 듣고도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 감이 잡힐 만큼 베테랑이 됐다.

대부분 5분내로 통화가 끝나지만 자기 사연을 털어놓는 상대를 만나면 길어지기도 한다.

“어제는 한 아가씨가 호주로 이민간 옛날 남자 친구 얘기를 해 20분 이상 통화했어요”

유씨의 월수입은 기본급 60∼70만원에 성과급을 합해 1백30만∼1백50만원 가량. 유씨는 “무엇보다 애들이 ‘엄마가 활기차졌다’면서 이해해줘 든든하다”고 말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