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대적 과제들 앞에서도 정쟁만 난무하는 요즘 생각나는 것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선생과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사이의 일화다. 두 지도자는 해방후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두고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다. 도쿄 유학생 시절부터 알던 두 사람은 3·1운동을 함께 조직하면서 뜻있는 동지관계가 됐다. 3·1운동 당시 해외연락을 맡았던 해공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으나 국내에서 중심역을 하던 고하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면서 서로 헤어졌다. 해방후 해공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귀국했으며 고하는 그 임정에 대한 환국환영회와 국민대회준비위의 대표였다.
▼宋鎭禹선생의 통합론 ▼
환국지사후원회가 활동기금을 전달하자 해공의 임정측은 그 속에 어떤 세력이 보낸지 모르는 돈이 들어있다며 되돌려 보낸 사건이 있었다. 이에 고하는 임정사람들을 나무랐다. “정부가 받는 세금속에는 양민의 돈도 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법 아닌가. 지금 국가를 건설하는 큰 일에 그런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다니.” 고하의 말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확실한 국민통합의 논리적 근거라고 할 만했다. 국민통합이나 정치적 제휴는 목표만 같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고하처럼 명쾌한 논리를 제시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무작정 세(勢)를 불리기 위해 좌파처럼 자신과 정치노선이 다른 집단까지 손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시대적 목표라면 경제 재건설과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 그리고 지역갈등을 발본색원하는 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는 개혁과제이면서 협력과 화합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것들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협력과 화합만 강조하다가는 개혁이 실종되기 십상이다. 배제와 척결의 아픔 없이는 잘못된 관행과 적폐(積弊)들을 바로잡기 어렵다. 통합은 동지를 늘리고 배제는 적을 만들게 된다. 특히 전환기에 적과 동지의 구분을 얼마나 강도 높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해방후 독립정부 수립과정이 대표적 전환기였다. 국민회의가 내세웠듯이 여야간 정권교체가 50년만에 처음 이루어졌다는 지금도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정권교체로 얻을 가치란 변화와 쇄신이다. 그것은 통합과 배제의 원칙이 전제돼야 성취될 수 있다.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노선인 통합과 배제를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혁명―개혁―현상유지―복고의 정치가 각각 다르게 나온다.
이제는 김대중(金大中·DJ)정부가 구사하는 통합과 배제의 혼합비율을 따져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여러 분야에서 쇄신을 기대하던 당초의 민심이 바뀌어가는 원인을 진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과 정치 싸움을 벌이느라, 또 공동여당인 자민련과의 입장차 때문에 일의 우선순위를 그르치기 쉬운 여건에 처해 있다.
▼5共세력과 386세대 ▼
국민회의가 시대적 개혁과제보다도 정권 재창출을 벌써부터 더 중요시하는 징표는 한둘이 아니다. 97년 대선 당시의 집권 전략으로 미루어 이제 그것의 재창출계획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이미지나 정책노선과는 거리가 먼 보수세력과도 제휴한 것이 DJ진영의 대선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무분별한 세 불리기가 벌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시선이 국민회의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즘 국민회의가 ‘5·18내란세력’과 손잡거나 그들의 반역사적 정치행각을 방조한다는 비난마저 대두되고 있다. DJ의 최측근중 한 사람인 한화갑(韓和甲)의원이 전두환(全斗煥)씨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칭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젊은층 수혈의 창구역도 맡고 있다. 제 아무리 집권당이라 해도 정치적으로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는 5·18세력과 386세대를 함께 아우르려는 것은 원칙없는 세불리기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송진우 선생과 같이 통합 우선의 철학을 가졌던 지도자도 자신과 역사관이 다른 세력까지 제휴하려 들지는 않았다.
5·18내란정권 아래서 분신 투신과 모진 고문사건들 속에 험난한 대학생활을 보낸 386세대의 리더들은 정치를 보는 눈이 남다르다. 동료세대의 엄청난 희생위에 서있는 그들이다.자신이 몸담을 정파의 오염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민회의는 세 확장에 급급한 나머지 개혁성을 잃는다면 결국 젊은층 수혈도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김재홍 nieman9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