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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미스터]관계중독 『나는 없고 오직 너와 함께』

입력 | 1999-05-11 19:14:00


외동딸로 자란 K씨(29·서울 강남구 청담동). 결혼 전엔 고시준비생이던 남편을 찾아 고시원에 매일 갔다. 하루라도 얼굴을 보지 않으면 불안했기 때문. 결혼 후엔 남편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 못하면 ‘내가 왜 사나’라는 생각이 마음을 흔든다.

‘내’ 삶의 의미를 ‘너’에서만 찾는 사람들. 성균관대의대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김이영과장은 “누구나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쏟을 목표와 대상을 갖고 있지만 이들은 특정인과의 ‘관계’에만 병적으로 몰두한다”고 설명.

★관계중독이란

‘나’는 없고 ‘너와 함께 있는 나’만 있는 것. 끊임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누군가를 찾는다는 점에서 ‘중독’이다. 이들은 △친밀한 누군가가 없으면 불안하고 △그에게만 ‘촉각’을 세워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도 쉽게 상처를 입는다. 이로 인해 우울증이나 불안증에 시달리며 결국 남에게도 불편을 준다. 심한 경우 정신질환의 초기단계인 ‘의존성 인격장애’로 발전한다.

★나와 너의 경계

전문의들은 관계중독은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또 다른 나’로 여겨 ‘경계’를 긋지 않아 생기는 것으로 본다. 즉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상태라는 것.

이들에게는 △부모의 과잉보호로 독립성이 없거나 △학대를 받으며 자라 자존감이 낮아 자아정체감이 형성되지 못해 ‘진정한 나’가 없다. 울산대의대 서울중앙병원 정신과 김헌수교수는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은 유아기에 묶여있는 것”이라고 설명. 특히 한국의 문화는 ‘우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더욱 ‘관계’에 몰두하도록 만든다는 것.

★아름답지 못한 관계중독

삶의 가치나 행복이 ‘남’에 의해 심하게 흔들린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며 충동적으로 자학적인 행동도 한다. 남편이나 자녀로부터만 생의 의미를 찾는 주부는 이들이 기대에 못 미치면 우울증이나 불안증에 시달리고 남도 괴롭힌다. 중년 여성이 겪는 ‘빈둥지증후군’도 이 중 하나.

극히 일부지만 위기상황에서 ‘자식은 나의 것’이라고 판단해 동반자살하거나 애인의 변심에 ‘네가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없다’며 자살하는 일도 생긴다.

★내 삶의 주인은 나

서울대의대 신경정신과 류인균교수는 “가족이라도 적절한 경계를 긋지 못하면 결국 상대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며 “특히 나의 ‘일부’가 다치지 않아야 나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치료의 첫걸음은 원인을 ‘한 걸음 떨어져’ 살펴보는 것. 이것만으로도 ‘인지치료’가 될 수 있다.

류교수는 △관계중독의 원인을 찾고 △나와 남 사이에 경계선을 그으며 △나를 아끼려는 마음을 갖고 △나만을 위한 일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