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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21]뿌리깊은 연고주의/공정한 경쟁이 없다

입력 | 1999-05-12 22:10:00


《97년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던 아시아 각국은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가 합리주의에 입각한 서구 자본주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지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공동체의식과 효(孝) 예(禮) 등 유교적 덕목을 내용으로 하는 ‘아시아적 가치’의 다른 한편에는 연고주의 족벌주의에 따른 부정부패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고주의는 지역갈등과 패거리문화 불신사회를 조장하고 부정부패를 싹 틔우는 ‘병리현상’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강조되고 있다.

합리적 계약보다 개인적 친소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연줄사회, 지연 학연 혈연 등을 기반으로 조성된 ‘끼리끼리’ 문화는 특히 공정성과 합리성을 저해한다. 나아가 보편적인 질서와 공적(公的)절차는 무시되고 줄과 끈을 매개로 한 부패가 싹트게 된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연고의식과 광범위한 사적 네트워크가 낳는 병폐를 진단하고 공직부패의 근원으로서 연고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본다.》

정부 중앙부처의 A국장은 한달 평균 7,8차례 저녁모임에 참석한다. 초 중 고교 대학 대학원의 총동문회가 1년에 한두차례씩 열리고 동기모임도 분기별로 한차례씩 있다. 향우회도 군(郡)과 도(道) 단위 모임이 별도로 있고 공무원만의 모임에다 민관군 합동모임이 따로 있다. 과거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사람들간의 비정기 모임도 서너개나 있다.

A국장이 이렇게 다양한 연고의 끈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토로.

“일단 ‘인연의 고리’를 엮어두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 최고급정보는 대개 이런 사적인 모임에서 나온다. 돈이 많이 들고 몸이 피곤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투자가치가 있다.”

얼마전 수석비서관이 새로 임명되면서 진용을 다시 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 비서관 6명 중 3명이 광주일고, 1명이 광주고 출신이다. “적임자를 물색하다보니 공교롭게 생긴 일”이라는 설명이지만 연고주의가 낳은 결과다.

이른바 ‘한보비리’도 K대 출신이 줄줄이 연루돼 사실상 ‘K대 게이트’라는 분석이 있었으며 ‘김현철 비리’ 또한 그의 고교 학맥인 ‘K2 비리’라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정부 부처마다 인사철이 되면 혈연 지연 학연에 따른 하마평이 사람들 입에 오른다. 이른바 TK PK MK 등의 지역 영문이니셜이 생겨나고 K1 K2 하는 학맥 이니셜까지 통용된다. ‘인맥’ ‘△△사람’이라는 평판도 따라 붙는다.

물론 정치권의 연고주의가 이를 조장한 측면이 크다. 정권이 바뀌거나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할 때마다 구호는 한결같이 ‘지역차별 청산’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인사가 있은 뒤를 보면 지역주의에 따른 편파인사였다는 시비가 있어 왔다.

이른바 ‘고승덕(高承德)변호사 파문’. 호남출신에다 경기고 서울대 출신에 한 여당의 총재를 장인으로 둔 그는 당초 “혈연이나 지연 학연의 고리를 끊겠다”며 고교와 대학선배의 추천 및 지원으로 야당의 공천을 받았다.

하지만 주위의 압력과 비난이 쇄도하자 “한국사회에서는 혈연은 뗄 수 없는 것 같다”며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고시 3관왕인 그도 ‘지연 혈연 학연’의 ‘3연(緣)’만은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간부문도 마찬가지다. 고려대교우회 해병대전우회 호남향우회 등의 남다른 결속력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다.

국내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배모씨(31). 몇년 전 H사에 입사했으나 1년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는 직장생활 내내 ‘왕따’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특정대학 인맥이 회사를 좌지우지했죠. 한 상사는 노골적으로 ‘우리 라인에 들어오면 편안한 생활과 미래가 보장된다’고 말하더군요. 그 라인에 있는 사람들은 룸살롱에 몰려다니며 비밀스러운 정보를 공유했고 세미나 출장 인사에서 각종 혜택을 나눠 갖는 것 같았어요.”

개인사업을 하는 김모씨(49). 별로 내세울 학맥이나 인맥이 없는 그는 명문대 야간 특수대학원을 세곳이나 다녔다. 그가 다닌 경영 행정 언론대학원에는 정 관 재계의 고위인사가 수두룩했다. 그는 지금 상당한 금액을 써가며 동기회는 물론 동문회의 간부직까지 맡고 있다. ‘필요할 때 줄을 대기 위해서’이다.

지성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몇년 전 우리나라 상위 20개 대학에서의 모교 출신 교수임용비율을 조사한 결과 평균 54%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 사립대의 경우는 97%에 달했다.

최근 한국교육개발원이 전국의 30세 이상 성인남녀 3천여명을 대상으로 ‘학교 교육의 효과’에 관해 조사한 결과도 연고주의의 실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도표 참조).

조사결과 대학졸업자의 45.7%가 ‘같은 학교 출신자나 동향인에게 더 많은 호의를 베푼다’고 답했다. 이는 초등학교 졸업자(38.4%) 중학교 졸업자(38.6%) 고교 졸업자(42.6%)보다 높은 수치로 배운 사람이 연고주의 의식이 더 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연고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사회에서 상호경쟁을 통한 조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과학기술원 이광형(李光炯·전산학)교수는 “연고집단의 최대목표는 ‘서로 감싸주기’여서 우월성 경쟁을 구조적으로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연고주의의 가장 심각한 병폐는 이같은 사적 네트워크가 공적 네트워크를 압도하면서 공정성과 효율성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12·12 쿠데타 당시 부대를 이탈하지 말라는 공식 명령계통이 무시되고 사조직의 명령을 따른 정치군인들의 행태는 그 대표적인 사례. 하다못해 교통사고만 발생해도 누구나 관할경찰서에 친지나 동창이 있는지를 먼저 수소문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전문가들도 우리나라 부패의 사회 문화적 주요 요인으로 연고주의를 든다. 뿌리깊은 연고주의는 합리와 보편이 존중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고서는 청산하기 어려운 일.

따라서 사회 전반적으로 각종 일처리를 공개화 투명화해 사적 네트워크가 끼어들 빈틈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정책결정이 투명하게 이뤄지고 민원행정이 공개적으로 처리되며 채용 승진 등이 공정하게 심사되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민간을 선도하는 공적 영역에서 공직자들이 출신향우회나 동창회의 임원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지적했다.

숙명여대 박재창(朴載昌·행정학)교수는 “일본과 영국의 경우 도쿄(東京)대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 등 명문대 출신이 인사관련 정부 조직에 일정비율을 넘지 않도록 제한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클린21`특별취재팀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