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자유는 물론 민주주의에도 목말라 했다. 이제 민주주의는 몰라도 ‘자유’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생각해 볼수록 우리만큼 ‘자유’를 누리는 나라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그렇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통신의 자유’만 해도 그렇다. 전철 버스 기차에서는 물론 어떤 공공 장소에서도 휴대전화 사용이 자유롭다. 여기 저기서 신호가 울려대고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쩌다 시비가 붙어도 신문은 가십거리로 처리하고 만다. 최근 뉴욕 맨해튼의 고급 식당들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는 이른바 ‘셀룰러 프리 존(Cellular Free Zone)’을 설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통신의 자유’를 우리 만큼 누릴 수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주차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주차장이 따로 없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버스정류장에도, 소방전 앞에도 자유롭게 차를 세운다. 차도나 인도를 가릴 것이 없다. 인도에 버젓이 주차한 까닭에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무릅쓰고 차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한다. 주차 위반이면 가차없이 차를 견인해 가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야말로 우리는 ‘주차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한가지 흠이라면 이왕 ‘주차의 자유’를 보장할 바에야 더 거리낌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도록 주차선을 그어주면 좋을 텐데 겉보기로는 주차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있다는점이다.
어디 그뿐인가. 음란물 유통의 자유 또한 잘 보장되고 있다. ‘O양의 비디오’는 어쩌다 화제가 됐을 뿐이다. 그것도 대중매체가 흥미거리로 다룬 탓에 드러났을 뿐이다. 간혹 영화의 외설적 표현을 두고 ‘표현의 자유’시비가 벌어지기는 해도 음란물 유통이 자유로운 현실에 견주어 보면 공연한 말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본질적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통의 ‘관리’가 더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음란물 유통의 자유가 보장된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가 그렇게 심각한 화두가 될 까닭이 없을 법도 하다.
음란물 유통의 자유 못지않게 표절의 자유도 잘 보장되고 있다. 방송이 그러하고 신문도 정보원을 밝히는 데 인색하다. 남의 논문을 송두리째 표절해도 대학에서 쫓겨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유와 관용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지는 이상의 몇가지 사례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것이다. 지면의 제약도 있으니 한가지만 더 지적해보기로 하자.
취학전 아동들은 전철을 무료로 타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이 무료탑승을 할 수 있는 65세 이상 원로시민들에게는 전철역에서 무료승차권을 주지만 아이들에게는 발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개구멍을 빠져나가듯 개찰구 밑을 기어나가야 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어린이들에게 자유를 훈련시키는 것이나 아닐까 싶기도 하다. 표 없이 공공의 편의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길러주기 위한 원대한 배려일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들이 성장한 뒤 해외여행이라도 하게 될 때 ‘표’를 사지않고 개방된 개찰구를 정정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어린이 날이면 언제나 녹음테이프를 반복해서 틀듯이 어린이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요란하게 떠들어댄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개구멍을 빠져나가듯 전철 개찰구를 기어나가게 해놓고도 아무런 느낌도 없어 보인다. 그만큼 당국자들은 무관심의 자유를 누린다.
이렇게 자유가 충만한 나라가 된 데는 무엇보다도 공권력의 기여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공권력의 관대한 행사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근원일 것이다. 거기에 교육이 또한 가세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자유를 억압할 수 있으랴. 이제 우리는 남의 자유를 위해 ‘침묵의 미덕’마저 터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유재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