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저 너머 있다(Truth is out there).”미국영화 ‘X파일’에 등장하는 문구다.한국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도 가세한다. “진실은 언제나 숨겨져왔다”고.
이름하여 음모론(陰謀論). 국제통화기금(IMF)사태이후 음모론이 우리의 목을 바짝 죄고 있다. 한국의 경제위기가 미국 등 세계 투기자본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공상가들 뿐 아니라 경제학자들에게까지 이미 설득력을 얻었다. 이같은 음모론이 대중문화를 통해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천재시인 이상의 시를 모티브로삼아 역사의 음모를 파헤친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1일 개봉이래 서울서만 17만5천여 관객을 모았다. 김진명의 소설 ‘한반도’는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뒤에 미국의 음모가 개입되었다는 주제를 다뤄 출간 한달만에 소설부문 1,2위를 다투고 있다. 인기 유아TV프로 ‘텔레토비’를 외계인의 음모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왜 음모론인가. 우리의 일상은 정말 우리가 모르는 집단이나 세력의 은밀한 음모에 의해 끌려다니는 것인가.》
□음모론이란?
음모론은 ‘고통과 재난 등이 어떤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의 음모에 의해 발생한다고 설명하는 방식’(칼 포퍼)이다.
이같은 시각은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세계와 삶을 명쾌하게 해석하기 어려울 때 등장한다. 혼란과 불확실성의 정체를 밝히고 그 이면에 숨겨진 악의 음모를 찾아내겠다는 시각. 특히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고 생명복제 등 보통 사람이 통제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음모론이 대중의 관심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음모론은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추리 기법을 통해 문화로 표출된다. 대중을 빨아들이는데 안성맞춤이다. 음모론은 처음부터 대중문화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특성이 시대적 불안과 맞물리면서 음모론이 세를 확장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영상매체에 나타난 음모론
영화 ‘건축무한…’은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음모를 바닥에 깔고 있다. 본격적 음모이론을 다룬 국내 첫영화인 ‘건축무한…’이후 음모론을 다룬 영화가 쏟아질 조짐이 보인다.
여름 개봉을 목표로 막바지 작업중인 ‘유령’은 핵잠수함을 둘러싼 강대국의 음모를 다룬다. 29일 개봉되는 ‘얼굴’은 지방소도시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음모를 파헤친다.
최근 한석규가 1천만원을 내건 제1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는 변이를 통해 진화된 신인류와 현인류의 살상 음모를 다룬 ‘제노사이드’(안재훈 작)가 당선됐다.
이제 시작인 충무로에 비해 할리우드의 음모론은 한 수 위다.
‘JFK’(91년)는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암살을 둘러싼 올리버 스톤 감독의 문제작. 제목부터 ‘음모’인 ‘컨스피러시’(97년)는 정부기관의 시민 통제를 소재로 했다.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쇼’(98년)는 미디어 권력의 가공할 음모를 다뤘다.
우리나라의 음모론 영화가 일본 강대국 등 외세의 음모를 주제로 삼는데 비해 할리우드 영화는 국가 또는 국가기구를 음모의 주체로 삼고 있어 대조적이다. 미국서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로 대표되는 국가기구가 첨단기술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며 개인을 통제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외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일까.
할리우드의 영화는 외계로까지 음모론을 확대한다. 미국 폭스TV사가 제작한 TV시리즈 ‘X파일’은 전세계 60여개국에 방송되면서 음모론에 대한 가장 진지하면서도 열광적인 관심을 끌어온 작품. 외계인과 결탁한 초법적 국가기구의 음모를 두명의 FBI요원이 파헤친다. 15일 국내 개봉된 ‘매트리스’는 2199년 인간을 지배하게된 컴퓨터의 ‘비인간적’음모를 그려 개봉 이틀만에 서울서만 14만5천7백여명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문학출판의 음모론
우리 출판계에서 음모론에 입각한 소설은 단연 김진명의 소설이 꼽힌다. 최근 나온 ‘한반도’에서 그는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직후 김재규가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주장을 한데 주목했다.
소설가는 또 76년 포드 미국대통령이 발표한 특별명령 11905호에 주목한다. ‘미국 정부의 어떤 공무원도 다른 나라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해선 안된다’는 내용. 그런데 5년 뒤인 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이를 다시 그대로 발표한다. 왜? 그 5년 사이 국가 원수가 암살된 나라는 한국뿐. 박정희 암살에 미국에 개입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지난해 한국의 금융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음모를 그린 김진명의 ‘하늘이여 땅이여’는 IMF사태를 예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외국의 시사 과학 사회과학 잡지를 다양하게 구독한다. 그러면 흐름이 보인다. 한국과 관련, 어떤 음모가 펼쳐지고 있는 흐름이….”김진명의 말. 따라서 자신의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중세 유럽 기독교의 갈등과 음모를 그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는 해박한 이론과 근거, 치밀한 추리와 묘사로 음모론 소설의 전범처럼 여겨지고 있다.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 등도 음모론을 다룬 소설로 꼽힌다.
□계속되는 음모론
88년 한 방송사 뉴스룸에 뛰어든 정신질환자는 “내 귀에 도청장치가 돼있다”고 외쳤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세상을 조종한다고 믿는 점에서 ‘컨스피러시’나 ‘X파일’의 주인공들은 일종의 편집증 환자다. 진실이든 아니든, 음모론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면 불투명하던 것이 명확해 보이기도 한다. 음모론의 강점이자 맹점이다.
지난해말 계간 문예비평지 ‘리뷰’가 공모한 음모이론의 당선작을 보자. 제목은 ‘유전자 조작과 미국의 음모’.
“…미국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 개발로 전세계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엔 미국의 세계 지배 음모가 깔려 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인류와 생태계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데 이를 해결할 정보는 미국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자, 이래도 당신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먹겠는가. 으스스한 음모론….
〈이광표·이승헌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