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한 번 짓고 나면 모두 반정부 인사가 된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서류, 담당공무원의 고압적 자세,이해할 수 없는 법규정….
공무원의 요구에 따라 서류를 수도없이 고치다보면 정작 건물을 튼튼히 짓는 일보다는 관청에서 서류를 통과시키는데 더 품이 든다.
많은 이들이 “공무원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일이 없고, 안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되는 일이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법령이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면 민원인들은 법을 지키기보다 해석의 권한을 가진 공무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 공무원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규에는 ‘기타 특별한 사유’ ‘충분한 조치’ ‘우려가 있을 때’ 등의 문구가 많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셈이다. 이 경우 공무원은 귀걸이인지 코걸이인지를 가리는 ‘절대자’나 다름없다.
게다가 민원인에게 공개되는 행정정보가 극히 제한돼있어 공무원과 민원인간의 뒷거래로 이어지고 있다. 행정업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쯤 어떻게 결론이 날지 예측할 수 없다면 민원인과 공무원 사이에 대등하고 공정한 일처리는 기대하기 힘들다.
모호한 법규정과 공개되지 않는 행정절차가 부정부패의 싹을 키우는 현실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주택건설사업을 하는 김모씨(45)는 올해초 재건축 사업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구청에 갔다.
두 번 걸음을 하지 않으려고 미리 관련규정을 꼼꼼히 읽고 서류를 갖춰 갔지만 담당공무원은 읽어보지도 않고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공무원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김씨는 조용히 물러났다.
일주일 후에 연락이 왔다. “재건축단지 주변도로를 전면 재포장하는 내용으로 서류를 보완하시오.”
김씨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따졌지만 “인근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말만 들었다.
결국 김씨는 세차례나 보완지시를 받았고 그때마다 서류를 다시 작성한 끝에 넉달이 지난 최근에야 겨우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김씨는 “규정상 30일 이내에 승인 여부를 통보하도록 돼 있지만 공무원이 보완을 요구하면 서너달을 넘기는 것은 예사”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이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법규정이 애매해 공무원이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일처리를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
건축법을 보자. ‘건축허가 사전승인은 건축물의 규모가 큰 경우 등 불가피한 경우 30일 범위내에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건축물은 공공의 이익을 저해하지 아니하고 주변의 대지 및 건축물에 지나친 불이익을 주지 아니하여야 한다’‘용도 규모 또는 형태가 부적합하다고 인정하는 건축물은 건축허가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서울시 건축심의기준도 마찬가지. ‘저층부의 재료와 색상은 상층부와 조화되게 할 것’‘구조계획상 불리한 평면은 가급적 지양’‘부대복리시설의 적절한 배치’….
이에 따라 공무원이 마음만 먹으면 ‘규정에 따라’ 수백번이라도 보완지시를 내릴 수 있게 돼있다.
착공신고서 제출시 첨부해야 하는 서류는 무려 52가지. 각각의 서류에 대해 공무원이 모호한 법규정을 근거로 토를 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이 주택업자들의 하소연이다.
민원인들 사이에 ‘괘씸죄에 한 번 걸리면 형기도 없고 형량도 없다’는 자조섞인 농담이 오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택산업연구원 김우진(金宇鎭)박사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규정해놓은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건축관련 법규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돼있기 때문에 공무원의 재량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고 말했다.
법규정이 모호하기로는 세무분야가 특히 심하다. 몇년 전 감사원이 세무관련 민원인의 심사청구 실태를 분석한 결과 법령해석에 따른 견해차이로 세무행정에 불복한 사례가 전체의 77%에 이르렀다.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세금액이 크게 요동치기 때문.
일선세무서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다 최근 계장으로 퇴직한 김모씨(58)는 “조세관련 법규나 시행세칙이 어렵고 모호할수록 세무공무원의 힘이 세진다”며 “공무원의 자의적 해석이나 편법이 동원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매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모호한 법규정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에 못지않게 행정절차가 공개되지 않는 것도 부정부패의 한 요인. 정책결정이나 집행에 참여한 주체가 공개되지 않고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이 ‘행정비리의 온상’구실을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형사정책연구원 연성진(延聖眞)박사는 행정불투명성의 대표적인 예로 교통사고의 경우를 꼽는다. 경찰이 교통사고 조사기록을 사고 당사자에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관련자의 로비가 심해지고 경찰은 이를 빌미로 시간을 끌거나 어느 한쪽에 유리하게 일처리를 할 여지가 있다는 것.
지난달 경북 포항시에서 사소한 접촉사고를 당한 이모씨(42)는 경찰이 상대방을 언제 조사했는지, 상대방이 뭐라고 진술했는지, 경찰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결국 공직에 있는 친척을 통해 알아본 끝에 쌍방 과실로 검찰에 송치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환경정책평가연구원 정회성(鄭會聲)박사는 “환경오염과 관련한 공무원의 비리가 심심찮게 터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밀실에서 처리되는 행정업무가 많기 때문”이라며 “단계별로 정책결정에 참여한 공무원의 명단과 역할을 공개하면 부정부패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시장의 판공비 내역을 공개하라는 참여연대의 요구를 몇달째 거부하고 있다. 상당수 기관장들이 판공비를 자신의 쌈짓돈처럼 써온 것은 공개의무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시민단체의 설명이다.
교육부가 장관 재량에 따라 지역별로 지원할 수 있는 특별교부금은 연간 약 5백억원이나 되지만 이 돈이 어느 지역에 어떤 명목으로 지출됐는지는 공개된 적이 없다. 국회의원이 자료제출을 요구해도 “그런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는 답변만 듣게 될 뿐이다.
한국행정연구원 박중훈(朴重勳)박사가 개인사업자 3백명을 대상으로 3월중순 설문조사한 결과, 건설 세무 환경 경찰 소방 등 모든 행정분야에 걸쳐 ‘기준의 불명확성’과 ‘미공개’가 부패를 유발한다는 응답이 각각 54.4%와 48.1%에 달했다.
이런 면에서 최근 서울시가 민원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민원 공개방’은 모범 사례로 꼽힌다. 민원인들이 인터넷의 시 홈페이지를 통해 교통 주택 위생 등 10개 분야 민원업무 처리현황과 결재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제도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김병섭(金秉燮)교수는 “투명한 상태에서 명확한 법규정에 따라 정책결정이 이루어질 경우 공무원과 민원인 모두 뒷거래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특별 취재팀
오명철팀장 이병기 이철희 박현진 윤종구 부형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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