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산에 들어가는 일 같다. 끝없는 자아 발견과 자기 수양의 길이다. 좋은 일 한다고 칭찬하면서도 사실은 이상한 사람, 할 일 없는 사람, 사서 고생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도 안다.
내 아이를 위해 남의 아이도 잘 키워야 한다고 입 아프게 이야기하지만 그들에게 20년 후 밝아진 세상을 미리 보여줄 수도 없다. 무관심으로 사회에 적대심을 가진 아이가 여의도에서 울분의 차량질주를 해 수십명이 죽고 다쳤다고 해도 다들 남의 일이란다.지난 5년간 남의 아이 8명을 키워 보냈다. 지금 3명을 키우는 나는 남의 아이 키우는 것은 또 다른 뜻의 신앙생활, 또는 없던 덕을 만들어서 닦는 작업이라 느꼈다. 끝없이 귀찮아 하고 끝없이 부정하고 끝없이 회의하고 끝없이 후회하고 끝없이 용서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매일 내 이기심과 나약함, 비도덕성, 시도 때도 없이 울컥대는 감정과 싸운다.
내 자식이 방바닥에 넘어져 훌쩍대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남의 아이가 넘어지면 “아이고 좀 조심하지”라고 아무생각 없이 툭 내뱉는다. 남의 아이가 방을 어지럽히면 따끔하게 야단치는 나, 이런 나를 질책하고 반성하고 위로하고 그러면서 성인군자가 아닌 자신에게 짜증을 낸다.
저녁에 돌아오면 집을 홀라당 뒤집어 놓아 화가 나고 내 아이가 싸워서 지면 화나고 맛있는 반찬을 내 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딴 애들이 다 먹어치우면 또 화가 난다. 이렇게 나 자신의 도덕성 형평성 인내심과 5년씩 싸우다 보니 이제서야 나는 왜 1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서구의 수양부모들이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똑같이 대하려 하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한다. 내 자식에게 정이 더 가는 것은 인륜이고 본성이기에 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은 헛수고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서서히 친해져라. 그러면 애정이 솟고, 그 애정을 통해 차별함이 옅어진다”고 했다. 이 말의 뜻을 아는 데 5년이 걸렸다. 4년 전에 온 아이와 7개월 전에 온 아이에게 가는 정이 다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키운 정은 키운 시간과 비례한다는 그 거대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서야 서둘지 않고 안달하지 않고 느긋이 웃는다.한국수양부모협회가 창립된 지 1년 2개월.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결손가정이 늘어 아이들이 협회로 밀려왔다. 지금까지 50여명이 수양부모와 살다가 친부모와 재결합했고 현재 40여명이 협회 소속 수양부모들의 손에서 자라고 있다. 남의 아이를 오래 끈질기게 키우려면 역설적으로 사랑을 반반씩 나누려 하거나 친자식과 똑같이 대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인간 이상인 존재만 반반씩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누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쉬이 지치고 병이 나 포기하게 된다. 마음가는 대로 서서히 사랑을 나누어주다 보면 사랑은 저절로 반반씩 나누어진다. 그것이 키운 정이다.
남의 아이를 키우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고 협소한 마음을 보고 못된 성질을 파악한다. 바로 이 자아발견이 배우는 점이다.
직장에서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면 시끌벅적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집, 그리고 무엇보다 외동으로 자라다가 수많은 ‘졸개’(동생)를 이끌고 어깨를 으쓱이며 다니는 내 아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매일 조금씩 자란다.
박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