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회장의 ‘사재(私財) 출연’ 문제가 정부와 재계 사이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총수의 방만한 경영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사재출연에 찬성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식회사 제도에서 정부가 경영책임을 이유로 사재출연을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는 반대론도 거세다.》
★찬성
재벌개혁을 원활히 마무리 짓기 위해 무모한 투자에 실패한 재벌총수가 사재를 출연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다.
재벌총수는 계열기업의 대주주이자 경영지배권자다. 기업이 도산해 기업 회생 또는 청산 과정에 들어가면 대주주를 포함한 모든 주주는 보유주식 한도에서 유한책임을 지는 것이 주식회사 제도의 원칙이다.
그러나 도산원인이 경영실패라면 경영 절대권을 쥔 재벌총수가 법적 경제적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 자본주의 정신의 발상지인 영국은 경영자의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개인적 손해배상 제도까지 두고 있다.
한국은 아직 이런 제도와 관행이 정착되지 않았다.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기업부실화를 막기 위해서는 경영에 실패한 기업을 퇴출시킬 때 경영지배권자의 책임을 묻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총수의 재산출연은 바람직한 법적 제도와 관행을 마련하는데 좋은 전기가 될 것이다.
재벌총수는 영향력에 걸맞은 엄격한 도덕성을 갖출 사회적 책무가 있다. 경제 부실화로 초래된 환란위기 때문에 금융 및 기업회생에 64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금융 및 기업부실화에 직접 책임이 없는 국민이 그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하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며 경제회생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마당에 재벌총수도 동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국가산업과 경제를 좌우하는 거대기업은 총수 일가의 세습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주주이익의 극대화에 경영목표를 둬야 한다. 총수의 사업확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업재원을 개인재산쓰듯이 해서는 안된다.
한국기업들은 뚜렷한 경영철학도 없이 엄청난 은행돈을 빌려 문어발식으로 외형만 확장하는 바람에 비슷비슷한 공룡기업집단이 생겨났다.
단순히 부채비율 줄이기, 기업간 사업교환 등의 대증요법으로는 재벌의 병폐를 근절할 수 없다. 정부의 개혁작업은 종합적이고 일관성 있게 추진돼야 한다. 사재출연이 재벌의 올바른 기업관과 경영철학을 정립하는 ‘정신혁명’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구석모(세종대교수·경실련 금융개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