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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로버트 파우저/한국엔 「비평적 傳記」가 없다

입력 | 1999-05-30 19:32:00


서점에 가보면 그 나라에서 ‘읽을 거리’가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 대형서점은 1층에 잡지나 문고판 도서를 진열해 놓는다. 반면 시집류는 위층 한쪽 구석에 묻혀 있다. 미국 서점에서는 할인 도서나 전기(傳記)류가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은 다르다. 시집류는 출입문 근처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지만 전기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美, 링컨 사생활도 다뤄▼

한국은 왜 상대적으로 전기가 적을까. 더구나 비평적 전기가 아주 드문 이유는 무엇일까.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처럼 논란이 이는 인물에 관한 전기는 여럿 나왔지만 그의 일생을 냉철하게 비평적 시각으로 분석한 것은 별로 없다. 중요한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비평적 전기도 상대적으로 적다. 영향력이 큰 현존 인물에 대한 전기도 주인공을 홍보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이 고작이다.

서구 국가에서는 비평적 전기가 역사 서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 링컨 대통령에 대한 비평적 전기는 많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링컨의 사생활을 다룬 것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각이지만 이를 하나로 엮으면 ‘링컨’이란 인물을 균형있게 그릴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최근 전기를 통해 미국 민주주의의 기반을 닦은 토머스 제퍼슨대통령이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최소한 한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같은 폭로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 오랜 논쟁은 끝이 났고 존경하는 사상가의 면모를 더 정확하고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미국의 혁신적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중요한 인물에 대한 비평적 전기는 뛰어난 창의성을 지닌 인물을이해할수있는 통찰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한국은 오랜 전기문화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소설적 전기가 대부분이다. ‘춘향전’ ‘홍길동전’ 등 유명한 고전문학 작품의 제목을 보면 ‘전(傳)’이란 접미사로 끝난다. 한 사람의 일생 이야기를 다룬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소설적 전기의 전통이 20세기를 맞아 비평적 전기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배, 한국전쟁, 군사독재통치가 역사적 인물이나 당대의 중요 인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소설적 전기는 오늘날 북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 선전용으로 변질됐다.

논픽션 장르인 비평적 전기의 목적은 무엇일까. 역사연구 방법의 하나인 비평적 전기를 통해 바로 ‘무엇이 역사를 움직였는가’라는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비평적 전기는 역사적 인물이나 현시대 인물의 ‘신비’를 벗기는데 가장 유용하다. 이러한 ‘비신화화(非神話化) 작업’이 반민주적인 정치 문화환경을 지원하는 ‘선전’을 타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왜곡도구로 전락▼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박전대통령을 재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박전대통령 덕분에 한국경제가 발전했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나머지 ‘유산’은 논란거리다. ‘박정희 향수’를 품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는 국익을 최우선시한 강력한 지도자인가, 아니면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 독재자인가. 역사는 분명히 재임 18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긴’ 냉혹한 독재자였다고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의 인생과 업적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룬 비평적 전기가 변변히 없기 때문에 ‘박정희 신화’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독재자를 신화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민주주의를 보호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강력한 지도력’과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는 ‘독재통치’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평적 전기는 정치 사회지도자들이 책무를 회피하지 못하도록 비판적 사회풍토를 조성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살찌운다. 한국은 민주주의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는 열망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이런 ‘열망’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한국의 학자와 언론인들이 오늘의 한국을 일궈낸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에 대한 비평적 전기를 쓸 때가 된 것 아닌가. ‘박정희 신화’를 벗기는 작업도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로버트 파우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