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후반, 미국은 유사 이래 중병을 앓고 있었다. 히피 인종 폭력 월남전반대 데모 인권운동…. 이로써 미국 사회는 끝장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천만의 말이다. 필자가 수학한 예일대학 도시 뉴헤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밖엔 난리가 나고 있었지만 대학 캠퍼스는 조용했다. 도서관은 만원이고 그 뜨거운 학구열 속에서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정적이 감돌았다.
▼상아탑마저 북새통▼
우린 여기서 미국의 저력을 확인한다.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하고 소란도 피우지만 연구하고 공부하는 분위기를 해치진 않는다. 서로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하되 방해는 하지 않는 불문율을 지키는 것이다. 그 저력이 세계 최강의 미국을 만들어 가고 있다. 오늘의 경제 호황까지. 우리의 캠퍼스는 어떤가. 도서관 앞은 굿판 같다. 시위 축제 스피커 꽹과리 함성 등이 캠퍼스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 지구상에 이런 대학은 없다.
오늘 우리 경제가 이 꼴이 난 것도 이걸 대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살 길은 고도의 신기술 개발 뿐인데 이 난리통에 무슨 연구며 공부랴. 깊은 사색에 빠질 수도 없다. 사색없이 무슨 창의력이 생겨날 것인가. 여기가 이 나라 발전의 한계점이다.
어디 학교뿐만인가. 온 나라가 소란스러우니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도 없다. 지하철에서 대합실에서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안하무인으로 떠드는 소리, 휴대전화소리, 잡상인의 외침속에 낮잠 한숨 잘 수도 없다.
해외에서 어글리 코리안이라 욕 먹는 것도 우리가 시끄러워서다. 호텔 로비에서, 승강기 안에서도 막 떠들어 댄다.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은 개인의 권리, 정적권(靜寂權)이 존중되는 사회가 돼야겠다. 이건 품격있는 사회, 그리고 시민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번 우리 연구소의 조사에서 국민 94%가 소음이 심각하다고 걱정을 했으며 그로 인해 짜증이 난다는 반응이 84%나 됐다. 동물이 소란스러운 환경에 놓이면 정서적 불안정은 물론이고 공격 중추가 자극받아 신경질적으로 된다.
클랙슨을 많이 쓰는 운전자일수록 사고를 잘 일으킨다. 이웃의 피아노 소리에 짜증이 나 벽을 부숴버린 사람도 있고 일본에선 아예 살인을 한 경우까지 있었다.
불면 초조 만성피로 등 도시인의 건강을 좀 먹는 원흉이 소음 공해 탓이다. 작은 일에도 버럭 성을 내는 충동성, 성격이 거칠고 급해지는 등의 파괴적 성향도 우리의 시끄러운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어떤 공해보다 소음공해가 가장 악질적이기 때문이다.
▼사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이젠 시골 콘도에서도 글쓰기는커녕 책 한 줄 차분히 읽을 수 없게 됐다. 복잡한 도심을 떠나 조용한 곳을 찾아 여기까지 왔을텐데 어쩌자고 그렇게들 떠들어대는지 복도는 아이들 운동장이고 방마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고스톱판 아니면 노래방을 방불케 한다. 그래야 스트레스 해소가 되고 즐거운 시간이 되는 줄 알고 있다.
물론 그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조용히 아이들 손잡고 시골길을 거닐며 밤하늘 별을 쳐다보는 건 더욱 운치있다. 그래야 아이들 가슴에 감성의 물결이 일고 시적 감흥에 젖을 게 아니냐.
불행히도 난 아직 그런 가족을 콘도에서 본 적이 없다. 그저 시끄럽다. 오죽하면 해맞이 나간 동해바다에서 사물놀이를 벌일까. 힘들게 오른 산정에서 해 뜨는 순간 “야호!” 고함을 질러댄다. 아, 그 해뜨는 순간에 말이다. 태고의 신비, 자연의 외경스러움 앞에 가히 숨이 멎는 그 순간에 어찌 고함이 나올까.
뜨는 해가 놀라 다시 들어갈 판이다. 요즈음은 아예 음악회를 열어 손님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 그 순간이나마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되게 할 순 없을까. 바람 소리, 갈매기 울음,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신비를 찬양할 순 없을까. 우주를, 자연을, 그리고 인생을 사색하며 아득히 철학적 분위기에 잠시나마 잠기게 해 줄 순 없을까.
세계적인 인구밀도다. 차분하고 조용한 사회를 만들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좁은 한반도는 이제 폭발 지경이다. 선진국은 조용해서 선진국이다.
이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