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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만에 해임 김태정?]폭탄주 파편에 결국 낙마

입력 | 1999-06-08 20:06:00


김태정(金泰政)법무부장관이 8일 끝내 옷을 벗었다.

부인 연정희(延貞姬)씨가 ‘고급 옷 로비 의혹사건’에 연루돼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사퇴 압력이 계속되던 중 자신이 총애하던 진형구(秦炯九)대검공안부장(대전고검장 내정자)의 취중 발언 때문에 낙마했다. 장관으로 임명된 지 15일만이다.

김영삼(金泳三)정부 당시 법무장관에 임명됐다가 10일만에 사퇴한 박희태(朴熺太)의원에 이어 ‘단명(短命) 장관’이 된 셈이다.

김장관은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전남 장흥군 부산면 출신. 그는 검찰총장이 된 뒤 “아버지가 ‘부산면’ 출신이어서 법조인대관 등에 출생지를 부산이라고 기록했다”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를 다녀 지금도 그의 말투에는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다.

6·25전쟁 이후 큰 형과 아버지만 부산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모두 어머니 고향인 여수로 돌아가 이후 여수중 광주고를 나왔다. 김장관 자신은 영호남을 두루 거치는 바람에 손해만 봤다고 평소 말해왔다.

그는 사시 4회 동기였던 최영광(崔永光)전고검장과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합을 벌인 끝에 그는 번번이 분루를 삼켜야 했다.

부산지검장으로 밀려난 이후 김장관은 검찰총장 자리를 건 세번째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치권 등에 로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김영삼전대통령의 아들 현철씨와도 가까워졌다는 것.

현철씨와 친분을 맺으면서 그는 김전대통령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김전대통령은 재임중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지검장을 맡고 있는 김장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격려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최전고검장을 세번째 승부에서 꺾고 97년8월 검찰총수에 올랐다. 그는 당시 언론이 ‘최초의 호남출신 총장’이라고 보도하자 이를 반기는 눈치였다.

그후 김장관은 97년 대선직전 ‘DJ비자금 수사유보 결정’을 내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으로부터도 각별한 신임을 받게 된다. 당시 동교동 인사들은 “김총장이 한 검찰간부를 메신저로 보내 당시 수사유보 결정을 귀띔해준 것으로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장관은 초임 검사시절부터 능력은 있었지만 배경이 없어 시골 검찰청을 5군데나 맴돌았다. 그를 잘 아는 후배검사들은 김장관이 ‘로비와 사교의 귀재(鬼才)’가 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덕지청 재임시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선거사범 엄단지시를 곧이 곧대로 믿고 당시 여당선거운동원 10여명을 구속해 대검의 감찰조사를 받기도 한 ‘순진한’ 일면도 지녔다.

당시 감찰조사를 한 김석휘(金錫輝)전법무부장관은 그후 그의 변함없는 후원자가 돼 자신이 검찰총장이 됐을 때 그를 대검 중수부과장으로 발탁했다. 그는 친구의 빚보증을 섰다가 집을 날리고 전셋집을 전전하면서도 한번도 친구를 원망한 적이 없고 오히려 다시 재기하라고 격려할 정도로 ‘눈물과 의리의 사나이’로도 통한다.

술을 마시다가도 기분이 나면 후배검사들의 집을 찾아가 후배부인에게 “고생이 많다”며 금일봉을 건네줘 부인을 감동시킨 일화도 많다.

그러나 검찰내부에서 검찰권의 중립적인 행사라는 측면에서는 김장관에 대한 시각은 곱지 않다. 많은 검찰관계자들은 검찰의 중립성이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은 그의 즉흥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처신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90년 초 아버지처럼 따른 큰 형이 세상을 뜨면서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된 김장관. ‘반은 경상도, 반은 호남사람’으로서 입신출세를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그가 파란만장한 공직생활 30년을 명예스럽지 못하게 마감했다.

〈최영훈·하종대기자〉c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