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물쓰듯 쓰는 습관이 우리에게 생긴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5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집에서 빗물을 받아 허드렛물로 이용했다. 추녀 끝의 물받이 차양 아래 커다란 항아리를 놓고 빗물을 모아 두었다가 화초밭이나 채마밭에 주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궁상맞은 고사를 들먹인다고 퇴박맞기 쉽다.
▼독일가정의 빗물 이용▼
그러나 국민소득이 우리의 네 배나 되고, 이른바 디지털 시대의 첨단을 가고 있는 독일의 중류가정에서 지금도 빗물을 받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 내가 가 있던 곳은, 비가 많이 오고 지표수가 풍부한 삼림지대로서,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고장이었고, 맛이 좋기로 유명한 맥주의 생산지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의 하숙집 뒤꼍 추녀 아래에 커다란 물탱크가 설치돼 있었다. 날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여닫이 뚜껑이 장착된 이 구리물통은 집을 지을 때 부대시설로 만들었다고 한다. 100여평 크기의 정원에 사흘간 줄 수 있는 물이 여기에 저장돼 있었다.
독일인들이 20세기 후반에도 끊임없이 개량해서 다양하게 이용하는 빗물 저수시설을 한국인들은 일천한 산업화 과정에서 깡그리 없애버렸다. 자연수를 이용하는 것이 곧 근대화에역행하는것이라고믿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음료수 제조, 정원급수, 자동차세차에똑같이 수돗물을 쓴다는 것은 어딘가 부조리하게 보이지 않는가.
산과 물을 잘 다스려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동양의 오랜 지혜를 쓸모없는 옛날 격언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전쟁의 포화로 폐허가 된 만둥산을 오늘의 푸른 산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반세기 동안 온갖 노력을 했다. 그동안 난방연료가 나무로부터 연탄을 거쳐 석유로 바뀐 것도 산림녹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짙푸른 녹음은 주말산행을 즐겁게 하고 이착륙하는 비행기에서 굽어보면 우리의 산하도 제법 풍요로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국토의 70%에 달하는 산에 생산성 있는 경제림을 가꾸지 못한 것은 부끄럽기도 하다. 게다가 온갖 소비적 위락시설 공사로 산과 숲이 잘려나가고, 도시주변의 그린벨트 훼손까지 가속화하는 현상을 보면, 치산치수(治山治水)라는 말이 진짜 옛말이 된 듯하다. 산이 망가지면 물도 제기능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덕유산 구천동 계곡 70리를 예로 들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곳곳에 물줄기가 핏줄처럼 퍼져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기 이를 데 없다. 물은 말할 나위도 없이 생명의 근원이므로 물을 제대로 다스리면 우리의 삶도 자급자족을 넘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깨끗하고 풍성한 물을 마구 더럽히거나 그대로 흘려버려서 이제는 먹을 물을 걱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食水 수입하는 지경에▼
귀가 멍멍하게 쏟아져내리는 폭포, 모기 한 마리 없이 청정한 산골짝 개울물, 송사리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샛강 물을 버려둔 채, 외국에서 식용수를 수입한다면 이것은 우둔함을 지나서 죄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예부터 우리나라에 좋은 물이 너무 흔해서 물을 가꿀 생각을 아예 안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수자원을 관리하는 작업이 너무나 큰 비용과 긴 시간을 요구하므로 단기간 집권하기도 바쁜 역대 정권이 주력사업에서 제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있는 것을 가꾸는 것보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야 돈도 생기고 생색도 난다는 발상 때문에 아름다운 강을 막아 댐을 만들고, 정든 고향을 수몰지구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외에 나가보면 우리나라 물처럼 석회(칼크)가 없이 깨끗하고 맛있는 물이 참으로 드물다는 사실을 누구나 깨닫게 된다. 왜 우리는 물을 수출자원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산과 물을 가꾸고 지키는 일은 산림과 하천과 환경을 담당하는 일부 관청이 즉결할 수 있는 전담사항이 아니다. 정부의 장기적 투자와 함께 우리 모두의 지속적 참여를 통해서만 서서히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참으로 어려운 사업이다. 주어진 자연의 혜택을 무작정 낭비하는 우리의 생활문화를 고치지 않는다면 세계화와 더불어 초국적 대자본이 우리의 물까지 인수합병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김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