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경제관리들의 말에는 날이 서 있는 느낌이다.
해외출장중인 공기업 사장을 당장 귀국시키라는 산업자원부장관의 위세당당한 호통에도 날은 섬뜩하게 서있었다. 기업개혁을 놓고 정부 고위관리들이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대재벌 압박 발언에도 날은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나마 말에 일관성이라도 있으면 대비를 하련만 시시각각 주장이 달라지니 정부의 속셈을 판독하며 살아가야 하는 재계는 하루하루 사는 게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대한생명 입찰만 해도 그렇다. 1차때 정부는 LG그룹의 참여에 전혀 토를 달지 않다가 2차입찰 직전에 느닷없이 “부채비율 200% 달성 전에는 새 사업을 못한다”고 빗장을 걸었다. 부채비율 감축은 연말까지의 숙제인데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이 왜 오뉴월에 그런 말을 했고 정부 방침이 왜 한달 사이에 변했는지 기업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뭔지 모르지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LG는 응찰을 포기했다. 정부가 3차입찰을 앞두고 다시 허용키로 하자 재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발언의 진의가 선명치 않을 때도 재계는 당혹스럽다. 강봉균(康奉均)재정경제부장관이 현대그룹의 한중인수 추진과 관련해 “현대의 주력업종에 포함되는지 여부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그 사례다. 광의(廣義)로 해석할 때와 협의(狹義)로 해석할 때 결론이 전혀 상반되기 때문에 재계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정부가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까 상황변화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하면 그만이란 말인가.
정부가 요즘 하는 일이 매양 그런 식이다. 명확한 기준과 룰 위에서 경제정책이 선택되기 보다 관리들의 말에 따라 정책은 춤을 춘다. 금감위원장과 재경부장관이 한마디씩 하고 나면 이어 공정거래위가 계좌추적을 벌이고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기다리는 순서로 진행되는 재벌 압박정책에서도 룰은 실종됐다. 필요하면 당당히 할 일이지 계좌추적이든 세무조사든 정부 말 안듣는 기업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어서야 국민과 기업 어느 누가 정책의 공정성을 믿겠는가.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혹자는 요즘 경제정책이 재벌해체를 밑그림으로 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재벌을 해체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이롭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중의 이익이 걸려있는 중대 사안을 정부가 공론의 과정없이 은밀하게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추진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본주의를 일탈하는 듯한 일들이 계속된다면 국민은 정부를 의심하게 된다.
시나리오가 있는지 없는지 정부 밖에 있는 사람들은 확연히 알 재간이 없다. 재계는 단지 “무언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보이질 않는다”면서 답답해 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들은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해 일하기 편했다고 한다. 강압적이긴 했지만 털어놓고 요구를 해오니 방향잡기가 수월했는데 이 정권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시나리오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기업하기가 몇배 힘들고 낭비적이라는 불만이다.
지금은 정부가 원칙을 공표하고 정책의 투명성을 높여야 할 때다. 원칙이 세워지면 타당성에 대한 논쟁의 과정을 거쳐 제도를 거기에 맞게 고쳐야 한다. 그리고 정책은 제도에 의해 집행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관리들의 말에 정책이 의존하는 꼴이 계속되면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개혁은 어림없다. 권세를 갖고 함부로 말하기 좋아하는 관리들이 훗날 말꼬리를 잡혀 망신을 당하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이규민〈부국장대우 정보산업부장〉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