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무서 직원과 협의가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다른 상가의 부가가치세 신고액수와 맞춰서 결정해야 하니까요.』
“숙녀복 제조업 계통 ‘매입세금계산서’가 필요하다고요? 마침 잘됐군요. 우리 거래처 중에 원단을 취급하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 한번 알아보죠.”
보통 사람들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부가가치세 신고기간 중 집단상가의 상인과 세무사 사이에서 자주 오가는 말들이다.
앞 얘기는 세무서 직원과 ‘세액 협상’이 끝나지 않았으니 상가 주인에게 좀 기다려달라는 세무사의 요청이고 뒷얘기는 자신에게 할당된 세액의 근거자료, 즉 매입세금계산서가 부족하니 구해달라는 상인의 요청에 ‘알아보겠다’는 세무사의 답변이다.
집단상가의 탈세는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자영업자들과 크게 다르다. 또 은밀히 매출액을 줄여 신고하는 일반 자영업자들과는 달리 매출액 규모를 얼마로 신고할 것인지를 놓고 세무서 직원과 공공연히 협상을 벌인다는 점도 특이하다. 한마디로 ‘협의과세’ 형식을 빌린 공공연한 ‘탈세’인 셈이다.
따라서 상가 주인(또는 세무사)과 세무서 직원의 ‘협상력’이 곧바로 납세액과 직결된다. 비록 매출액이 많은 상가라도 ‘협상력’에 따라 세금액수가 적을 수도 있다. 상가 주인들이 ‘힘있는’ 세무사들을 동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협의과세’는 어떻게 이뤄질까. 집단상가엔 대부분 상인회가 조직돼 있다. 상인회는 부가가치세 납부 때가 되면 세무사와 회계사를 동원해 전체 상가의 세액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놓고 세무서 직원과 ‘협상’을 벌인다. 말이 ‘협상’이지 ‘흥정’에 가깝다는 게 이런 일을 직접 경험해 본 세무사들의 귀띔이다.
협의를 거쳐 전체 상가의 부가가치세액이 결정되면 상인들은 자신의 몫만큼 나눠 낸다.
서울 강북의 대표적 집단상가인 A상가가 이와 같은 ‘협의과세’를 통해 97년 1·4분기에 낸 부가가치세는 5700만원. A상가의 소속 상인이 500명선인 점을 감안하면 1인당 11만4000원씩 낸 셈.
이 때 세액에 맞는 매출액 규모는 의뢰받은 세무사가 ‘알아서’ 작성해준다. 이 경우 상인들이 내는 세금은 상가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 내야 할 세액의 10∼30%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세무사들의 얘기.
심지어 소속 상인이 1000여명인 서울 강북의 한 상가는 지난해 초 신설상가인데다 불황이라는 이유로 1·4분기 부가가치세를 업소당 1만여원만 낸 경우도 있었다.
이런 협의과세를 위해 무자료거래와 매출액 축소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흔히 거래사실 근거를 아예 없애거나 거래액을 줄이는 수법이 사용된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맡는 사람이 ‘자료상’으로 불리는 ‘탈세 거간꾼’. 이들의 역할은 가짜 세금계산서를 모아 매입 매출액을 조작하려는 상인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이들의 수는 서울시내에만 수백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의 도움으로 빠져나가는 세금만도 연간 수천억원에 달한다는 게 세무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집단상가의 탈세 규모는 얼마나 될까. 서울 동대문시장 주변 의류상점의 수만 해도 4만∼5만개.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집단상가에 소속된 상점수가 전국적으로 50만∼100만개는 되리라는 게 관계자들의 추정이다. 전문가들은 집단상가의 탈세액만 연간 수조원 이상의 규모일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집단상가의 탈세는 곧바로 다른 자영업자들의 탈세로 이어진다. 집단상가에서 무자료로 거래했을 경우 상대업체 역시 과세 근거가 없어 탈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집단상가의 탈세를 막을 경우 연쇄탈세를 방지하게 돼 5조원 이상의 세수 증대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집단상가의 탈세 관행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집단의 논리가 작용하는데다 일부 상인들이 성실하게 거래하려 해도 거래 상대방이 이를 싫어해 거래를 끊거나 상가 내에서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조세연구원 현진권(玄鎭權)박사는 “집단상가는 무자료 거래의 온상인데다 집단상가의 탈세가 다른 자영업자들의 탈세까지 부추긴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분야”라며 “과세특례제의 폐지 등 무자료 거래의 여지를 줄이고 세무인력을 보강하는 등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