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의 광복은 곧 분단으로 이어졌고 금강산은 갈 수 없는 땅이 돼 버렸다. 실경에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금강산과 금강산그림은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춘곡 고희동, 내고 박생광, 이당 김은호, 남농 허건 등이 50∼60년대에 금강산 그림을 간간이 그렸다. 이들의 작품은 금강산을 추억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분단의 역사 속에서도 금강산 그림에 자신의 예술혼을 투영시켜 걸작을 남긴 작가 중에는 소정 변관식 (小亭 卞寬植·1899∼1976)을 으뜸으로 꼽는다. 조선시대 최고의 금강산 작가가 겸재 정선이라면 20세기에는 소정 변관식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30년대에 금강산을 여행하며 여러 명소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은 나의 산수화는 금강산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내가 평생 그려도 다 못 그릴 장엄미를 갖춘 것이다. …내 머리와 가슴 속엔 금강산의 기억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화랑’ 1974년 여름)
이처럼 ‘금강산과 하나된’ 변관식이 그 장엄미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중반쯤이다. 그러나 현존 작품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금강산 그림은 59년에 그린 대작 ‘삼선암 추색도’(개인소장)이다. 만물상 입구에 솟은 삼선암의 위용은 마치 현대적 추상조각을 연상시킨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이 바위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특히 삼선암 중에서 가장 우뚝하고 뾰족한 상선암을 중심에 놓고 만물상 풍경을 재배치한 구도는 변관식이 금강산에서 새롭게 발견한 형상미이다. 50년대 후반 양식화되어 변관식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적묵(積墨)과 파선(破線)’의 기법이 역동적인 화면을 연출해내고 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먹점을 반복해 찍는 초묵법(蕉墨法)을 구사하는 등 다양한 기법으로 삼선암을 그리며 개성미를 발휘했다.
대체로 변관식의 회화에서 다른 소재의 경우 태작이 섞여 있는데 비해, 삼선암도는 실패작이 거의 없는 편이다. 삼선암 바위의 기세가 자유분방한 변관식의 성품에 잘 부합했던 것 같다.이로써 변관식은 자신의 회화사적 위상을 조선시대 대가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삼선암에 이어 변관식이 즐겨 다룬 금강산의 명소는 외금강의 옥류동(玉流洞)이다. 그 대표작이 1963년 가을에 그린 대작 ‘옥류천도’이다. 편평하게 가로놓인 바위와 그 옆의 선바위를 중앙에 배치하고 왼편 옥류동 입구의 석벽과 오른편 암벽길을 높게 과장해 거대한 석문처럼 배치했다. 이 점이 그의 다른 옥류동 그림과 차별화 돼 금강산의 장엄미를 느끼게 해준다. 즐겨 쓰던 짙은 농묵(濃墨)을 자제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옥류동의 장관은 50m높이의 흰 폭포와 비취색의 못에 있는 데, 이 그림에서는 소(沼)와 폭포를 생략했다. 그래서 실제풍경과 비교해보면 옥류동보다는 옥류동 위의 연주담에 더 비슷하다.
오랫동안 이 작품은 누구나 변관식의 걸작으로 꼽아왔는데 최근 변관식과 관련된 몇몇 기획전에서는 누락됐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이 1963년 제12회 국전에서 조순자(趙順子)의 입선작이었기 때문이다. 국전도록에 똑같은 작품이 ‘금강옥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현재는 도록에 있는 ‘순자(順子)’라는 서명만 지워놓은 상태.
이 과정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관에게 들을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변관식은 한국화를 전공하는 조순자의 부친과 절친한 사이였고, 그 집에 자주 내왕했다. 당시 조순자는 인물화를 하고 싶어서 변관식 또래의 다른 작가에 배우고 있던 중이었다. 변관식이 이를 알고 버럭 화를 냈고, 붓을 들어 단숨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순자’의 이름을 써서 국전에 출품시켰다는 이야기.
변관식은 당시 국전의 운영방식에 반기를 들던 때였다. 친한 친구의 딸이 남에게 그림을 배워 국전 출품을 준비하는 모습에 흥분한 것은 당연지사. 단숨에 우연히 그린 작품이 수작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여성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던지 외금강 ‘옥류천도’에는 변관식 특유의 까실한 맛이 적고 먹의 농담도 차분한 편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명품이 된 것 같다.
이태호(전남대교수·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