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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백기완/백범의 큰 가르침

입력 | 1999-06-25 19:14:00


백범, 우리에게 무엇일까.

내가 어려서 서울역전을 전전하던 1948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백범선생을 찾았을 적이다. 내가 황해도 구월산 백태주 어르신네의 손자라고 하자 사뭇 놀라시며 선생이 젊은 날 우리 할아버지한테 쇠대접, 즉 소를 통으로 대접받으셨다며 금세 눈시울을 붉히시더니 하시는 말씀이었다.

“기완아, 통일이란 무엇인줄 아느냐. 지난날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던 애국심이 하나가 되어 다시 쳐들어온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오, 그리하여 백성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승부의 세계가 아니라 양심이 하나되는 것이란다. 이 점을 너희들의 세대가 오면 알 것이니 꼭 명심하거라.”

이때 어린 나는 그 뜻이 무엇인줄 잘 몰랐다. 그저 밥이라도 한 상 차려 주었으면 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말뜻은 번쩍 드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첫째, 다시 쳐들어온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는 것은 8·15를 전후해서 강화되던 동서 냉전구조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때만 해도 동서 냉전구조는 세계사의 필연적 발전단계로 보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분단을 강요받는 민족적 입장에서 볼 때 동서 냉전구조는 민족사와 세계사 전진의 걸림돌이었으니 이점을 지적했다면 참으로 백범은 누구일까. 단순한 통일운동의 지도자가 아니라 반냉전 세계사 변혁의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통일독립은 자주성의 확보라는 백범의 정확한 가르침이다. 잘 아는 바 동서 냉전구조는 세계 여러 민족국가의 자주성을 파괴 박탈해 가는 이원론이었음은 그 역사과정이 입증한 바다. 그런데 진작부터 통일이란 자주성의 확보임을 지적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냉전이라는 이원론적 세계사 흐름의 거짓됨을 찢고 올바른 민족노선을 제시한 위대한 선각자인 것이다.

세번째로 통일은 백성이 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백범의 말씀은 통일의 알짜(實體)를 가장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무슨 말일까. 통일은 독점적 물리력이 온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통일은 너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백성이 고루 잘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니 이보다 더한 선각자적 가르침이 또 있을까.

세월은 흘러 백범선생이 흉탄에 쓰러지신 지 어느덧 쉰 해, 여기저기서 백범을 추모하는 행사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너도나도 백범을 추모하되 진작부터 백범이 제시했던 반냉전의 논리를 오늘에 발전시키고자 하는 낌새가 아니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또 여기 저기서 교착된 오늘의 남북 문제를 풀어갈 지혜와 슬기를 백범에게서 배우자고 하면서도 기실 백범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음을 본다. 백범의 통일이란 남북이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네 현실은 어떠한가 말이다. 이른바 국제통화기금체제로 하여 자주성이 해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백범의 가르침에 따를 것이면 통일은 백성들이 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말이다. 이른바 국제통화기금체제 아래 빈부의 격차는 더욱 깊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통일을 말하기에 앞서 한번쯤 백범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게 아닌가.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승부의 세계가 아니라 양심이 하나되는 것이라는 위대한 가르침 앞에 한번쯤 발가벗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백범을 또 한번 죽이는 경우가 될지도 모른다.

백기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