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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밀레니엄 베스트]교황 켈레스티누스5세

입력 | 1999-06-27 19:01:00


필자는 지난 1000년간 존재했던 교황들 중에서 가난하고, 라틴어도 제대로 모르고, 정신도 그다지 온전하지 않았던 켈레스티누스5세를 가장 좋아하는 교황으로 꼽는다.

일부 사람들은 기독교가 권력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교황의 옥좌에 앉는 사람은 독재적인 군주가 아니라 순한 양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른 교황은 많았어도 진짜 종처럼 겸손한 행동을 보인 교황은 많지 않았다.

현대의 교황중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바오로6세다. 요한23세가 햄릿과 비슷하다고 표현했던 그는 고뇌에 찬 자유주의자였다. 바오로6세는 교회의 전통에 집착한다는 과격파들의 비난과 예배형식을 왜 바꿨느냐는 전통주의자들의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어려운 시기에 켈레스티누스5세의 무덤으로 기도하러 갔다.

당시 언론은 바오로6세의 기도내용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켈레스티누스5세는 역사상 교황직을 사임한 유일한 교황이기 때문이었다. 바오로6세는 아마 자기도 좀 더 과단성 있는 사람에게 이 굴레를 넘겨줘도 될지 창조주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천만 다행으로 그는 사임하지 않았다).

켈레스티누스5세는 중세 교회를 좌지우지하던 마피아 스타일의 권력자들이 내분을 벌이는 바람에 교황자리가 2년동안 비어있던 시기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이 되기전 피에트로 신부라고 불렸던 그는 농부출신의 신비주의자로 당시 85세였으며 신앙심 깊은 바보들의 수도회를 설립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수도회를 이끄는 것도 그에게는 힘에 부쳤다. 교황이 되기전 그는 이탈리아남부에 있는 산비탈의 작은 동굴에서 살았다.

주위사람들에게 그는 치료사, 예언자, 꿈꾸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지역의 농부들은 그가 기도하는 동안 수도복을 햇빛이 비치는 곳에 걸어둔다고 믿고 있었다.

1294년 7월5일부터 12월13일까지 전혀 원하지도 않았던 교황직에 올라 힘든 시간을 보냈던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그가 워낙 교황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지방영주들과 정치가들은 교회에 대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켈레스티누스5세는 라틴어를 거의 몰랐기 때문에 사상 처음으로 교황의 직무를 이탈리아어로 수행했다. 그는 궁전안에 산기슭에 있던 자신의 오두막과 닮은 집을 지어 달라고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그들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었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직에서 물러나버렸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거만하고 자존심 강한 보니파스8세였다. 그는 로마를 찾아온 순례자들을 맞으면서 “내가 황제다!”라고 외친 사람이었다. 보니파스는 켈레스티누스를 감옥에 가두었고, 켈레스티누스는 감옥안에서 누군가에게 고용된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클레멘스5세는 그를 은자이자 고백자인 성 피터로 봉안했다. 그러나 단테는 그가 교황직을 버렸다는 이유로 지옥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켈레스티누스5세는 권력을 추구하는 것과 신을 경배하는 것 사이에는 전혀 연결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룩하게 되는 것을 거부한 거룩한 사람이었다.

▽필자〓A N 윌슨(「예수의 생애」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