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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송기호/꿈꿀 수 있는 여유가 그립다

입력 | 1999-06-27 19:01:00


지난 주말에 송광사에 다녀왔다. 한국학을 전공하는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예불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불교 신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어쩌면 예불을 체험했다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짧은 찰나에서 그야말로 청정하고 순진무구한 세계를 한없이 경험하였다.

건너편 용마루에 걸린 석양 빛이 대웅전으로 들어와 독경하는 스님들 뒷모습을 비추니 음과 양이 어우러진 실루엣이 마치 이승과 저승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듯하였다.

오전 3시반 어둠 속의 천지를 깨우는 범종 소리는 땅 속의 미물을 구제하려 울리고 있지만 내 가슴 속에서도 큰 소리로 공명하고 있었다. 언젠가 거문고 소리가 강당을 울리며 내 가슴까지 울렁이게 만들었던 추억도 떠올랐다.

짧은 경험 속에서 느낀 억겁의 상큼함이 돌아오는 차 속에서는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해 본 108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려서가 아니었다. 다시 어지러운 세속으로 돌아와야 하는 막막함 때문이었다. 정치는 정치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남북 관계는 또 그대로, 어디 하나 희망을 붙일 만한 곳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날마다 벌어지는 일들에 입을 다물기 어렵고 한숨만 절로 나온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답답함을 그 어디 풀 길이 없으니 만백성이 모두 우울증에 걸릴까 두렵다. 이렇게 하루 하루에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고 있으니 며칠 앞이라도 내다보는 여유마저 없다. 우리 사회가 이상도 꿈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시간에 떼밀려 가고 있다.

대학도 그러기는 마찬가지다. 몇 년 동안 지루하게 학사제도 개편을 논의하고 있건만 한 발짝도 진전된 것이 없다. 성과도 없이 지칠대로 지쳐 있는 판에 이제는 ‘두뇌 한국’이란 기괴한 미끼를 대학사회에 던져 모두들 ‘골 아프게’ 만들고 있다.

한쪽에서는 신청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난리가 났고, 다른 한 쪽은 돈 가지고 농간을 부리느냐고 아우성이다. 우리 대학에서도 이를 받아야 하느냐 마느냐 하면서 연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신청서 작성에만 매달려 머리를 싸매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회의, 고성만 오가고 결론도 없는 지루한 회의에 모두들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 지금 같아서는 제발 그대로 놓아 달라고 하고 싶다. 공부하는 대학을 만들겠다더니 조용히 연구실에 앉아 있을 여유마저 빼앗아 버리고 있다. 대학에서도 비전 없이 우왕좌왕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이번 학기에도 ‘현실과 이상’이란 주제로 교양 한국사 강의를 마무리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과연 무슨 이상을 품고 살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자연스레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면서 강의를 맺었다. 아쉽게도 우리 역사에는 제대로 성숙된 나름대로의 이상향이 없었다. 기껏해야 요순 시절과 무릉도원이 우리 선조들의 유토피아였다. 남의 꿈을 꾸어 왔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이상향마저 지니고 있지 못하다. 세계의 조류에 따라 그저 표류해 다닐 따름이다. 밀레니엄 시계가 180여일을 가리키고 있는 이즈음 희망은 어디로 가고 날마다 한숨이다.

아침 예불을 끝내고 죽순이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아 있는 대나무 숲길을 따라 휘파람새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불일암에 올랐다. 그저 소박하게 꾸며진 암자에서 스님이 정성스레 따라주는 차를 마시니 절로 미소가 솟는다.

암자 처마에는 작은 수박덩이만한 말벌 집이 걸려 있었다. 몇 년 전에 말벌이 살다 나간 그곳에 올해는 새가 보금자리를 틀어 새끼를 키우고는 며칠 전에 이사를 갔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아온 스님의 말씀에 온화함이 배어 있다. 이런 청량감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그리워진다.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회가 그리워진다.

송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