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스미(5)는 작년 11월 일본여자대학부속 호메이(豊明)유치원 입시를 치렀다. 마에 노리코 원장의 질문. “팬더가 소풍을 가려는데 구름이 짙게 끼었어요. 뭘 갖고 가야 할까?”히로스미는 앞에 놓인 장난감 안경 과자 동화책 등 수십가지 물건 중 우산 장화 비옷을 골랐다. 합격. 12대1의 경쟁률. 이 명문사립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 히로스미는 6개월간 ‘유치원입시 준비학원’에 다녔다. 도시락통 끈묶기, 서서 신발신기 등을 배우며 예절 관련 입시문제에 대비했다.
◆게이오 보이
명문사립 게이오(慶應)대 부속유치원에서 출발, 게이오 초중고와 대학를 거쳐 중앙부처공무원 등 사회엘리트층으로 골인하는 일본인을 일컫는 말. 일본인들은 이를 ‘에스컬레이터현상’으로 부른다. ‘성공인’은 유치원입학으로 ‘점지’된다는 믿음이 강하다. 명문사립초등학교 입시 때 명문유치원 출신이 유리하다는 게 학부모들의 얘기.
호메이유치원은 어떻게 사회엘리트의 자질을 심어줄까. “특별한 교육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아이들을 모아놓는 게 방법이지요. 상대의 능력과 품성에 스스로 자극받도록 말입니다.”(교사 쿠로 세·45·여)
◆각자 흥미를 좆아
8일 오전 도쿄 분쿄(文京)구 호메이유치원. 교사들은 △종이접기 △식물가꾸기 △공놀이 △훌라후프 △토마토 따기 △고구마요리 등 교육현장별로 한명씩 자리잡고 아이들은 현장을 마음대로 옮겨다닌다. 교사는 질문에 답할 뿐 요령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타루(5)처럼 색종이로 홍당무 모양을 접기 위해 동료의 어깨너머로 꼬박 일주일을 배워야 하는 일도 생긴다.
실내 곳곳의 커다란 거울은 안을 들여다 볼 수만 있게 만든 것. 교사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글자나 숫자공부는 교과과정에 없다. 흥미를 갖고 물어올 경우에만 답한다. 그 흥미는 간판읽기 등으로 발전하며 이 과정에서 아이들끼리 경쟁한다. 원생은 대부분 5세면 기본적인 글자를 쓰고 읽는다.별도의 전문학원을 이용하는 학부모도 있다.
◆‘오아시스’의 끝
‘오아시스’는 ‘오하이요 고자이마스’(아침인사) ‘아리가토 고자이마스’(감사) ‘시쓰레이시마스’(실례합니다) ‘스미마생’(미안합니다)의 첫글자를 딴 말. 8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유치원교육은 예절과 생활습관 교육에 초점을 둔 ‘오아시스’교육이었다. 그러나 89년 21세기를 대비한 교육개혁이 시작되면서 창조력과 자율성 기르기 위주로 무게중심이 옮아가고 있다. 문부성 고마쓰 신지로 유치원과장은 “79년 249만여명이던 5세 이하가 98년 178만여명으로 급감함에 따라 ‘수험전쟁’이 의미를 잃어간다는 판단도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방해’라도 말아야
도쿄 신주쿠(新宿)구 메지로(目白)대 부설 유치원에 다니는 히카루(5)는 얼마전 학예회에서 공주를 해치려다 개과천선하는 악마역으로 박수를 받았다. 왕자가 아닌 악마역을 하도록 권한 것은 어머니 이와사 미카코(37).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악마역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극이 성공하려면 악마가 꼭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이와사는 아들에게 “잘하는 것(철봉)을 다른 아이에게 가르치고 대신 못하는 것(글자읽기)은 ‘고개를 숙이고’ 배우라”고 매일 일러준다.
이 유치원의 미술시간. 우에조노 카요코 원장은 아이들에게 죽순을 나눠준 뒤 ‘그리고 싶은 사람만 그리라’고 말한다. 죽순을 산산조각(해부)내는 아이도 있고 아예 먹어버리는 아이도 있지만 목표는 어떻게든 죽순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누구나 미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중요한 것은 나름의 능력을 찾아 키우는 일이고, 그것도 안되면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고, 그것도 안되면 능력있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는 품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번 취재에 동국대 유아교육과 김세곤교수가 동행,도움말을 주셨습니다)
〈도쿄〓이승재기자〉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