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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금강 紙上展]김홍도의 「만폭동도」

입력 | 1999-06-30 20:39:00


1788년 가을 정조는 어명을 내렸다. 김홍도와 김응환(金應煥)에게 금강산 일대의 풍광을 그려오도록 한 것이었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는 정조의 총애를 받는 최고의 화원(畵員)이었다. 이 때 정조에게 올린 김홍도의 그림은 옆으로 긴 두루말이에 가을 풍악의 아름다움을 담은 화사한 채색그림이었다는데,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화첩 ‘금강사군첩’이 알려져 있지만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그리고 정조는 금강산 주변의 고을 지방관들에게 두 화가가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우라고 어명을 내렸다. 덕택에 김홍도는 선배화가들보다 더 많은 금강산 곳곳을 화폭에 담을 수 있었다.

당시의 금강산 여행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양에서 금강산까지 왕복에 한달여가 걸리는 긴 여정도 문제였지만, 금강산 탐승(探勝)도 안내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비들의 탐승에 금강산 주변 마을 사람들이 동원됐고 사찰의 승려들이 가마꾼 겸 등반 안내자로 차출됐다. 그런 탓에 주민들과 승려들의 불만이 컸고, 심지어 어느 관료의 가마를 메던 승려들이 관료와 함께 금강산 못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에 비해 정조의 어명으로 진행된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은 축복받은 일이었다. 정선이 주로 내금강과 관동팔경을 대상으로 삼았던 데 비해 김홍도는 험준한 외금강의 곳곳 절경까지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1788년 금강산 스케치 여행 이후 김홍도는 인물 풍속화가에서 산수화가로 변모했다. 사생화를 토대로 금강산 그림을 계속 그려, 50대 때 그의 금강산 그림들은 원숙한 회화미를 갖추게 된다.

지방에서는 공개된 적이 있으나 서울에서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김홍도의 ‘명경대도’와 ‘만폭동도’(개인소장) 쌍폭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그림들 가운데 백미로 꼽을 만한 그림들이다.

대작의 비단그림 ‘명경대도’와 ‘만폭동도’는 당시 상당한 세도가에게 그려준 듯, 풍기는 격조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따복따복 치밀하게 실경을 묘사했으면서도 필치와 묵법이 무르익은 점으로 미뤄볼 때 김홍도가 금강산을 여행한 후 10여년쯤 뒤에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8폭의 금강산 그림과 유사한 점을 보여주는데, 유연한 선묘와 담채담먹의 세련미가 한층 진전돼 있다.

‘만폭동도’의 진한 먹을 구사한 적묵법과 수직으로 내리그은 듯한 원경의 기암표현에는 정선 화풍의 잔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잡목표현이나 각진 바위그림, 경물(景物)배치에서 사선으로 흐르는 구성법은 김홍도의 개성적 특징이다.

이 ‘만폭동도’를 정선의 ‘만폭동도’(서울대박물관소장)와 비교하면,그 현장 포착과 시방식(視方式)의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다.정선은 비로봉부터 중향성 심지어 보덕굴까지 내금강 전경(全景) 속에 만폭동을 배치했다. 반면 김홍도의 그림은 금강대와 소향로봉을 중심으로 만폭동을 내려다 본 시점에 맞게 금강대와 암반계곡, 그리고 근경(近景) 바위에 가려 살짝 드러난 법기봉의 일부와 원경(遠景)의 백운대 구역만을 그렸다. 개개의 바위와 숲, 물길 등 형상표현에도 설명적 묘사가 두드러져 있고 만폭동 계곡에서 탐승을 즐기는 선비들과 거간꾼 승려들까지 치밀하게 묘사돼 있다. 금강대 아래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1517∼1584)의 초서 새김글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까지 그림에 써넣었다. 풍속화가다운 현장읽기다.

만폭동과 명경대는 너른 암반에 수량이 풍부한 내금강의 계곡미를 완상할 수 있는 최고의 명승으로 꼽히는 곳이다. 정선이 만폭동도에서 빠른 필세로 계곡의 자글거리는 물소리를 표현했다면 김홍도는 연한 담채와 담묵 구사로 계곡의 소쇄한 맛을 살려냈다고 할 수 있겠다.

분명 정선의 금강산 그림은 예술적 울림을 극대화한 강점이 있다. 대신 당대 친구들도 지적했듯이 실경과는 닮지 않았다. 이와 달리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에는 실경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느껴진다. 이는 김홍도가 풍속화가로서 현실감 넘치는 풍속도를 그려온 이력과 통하는 점이기도 하다.

한국회화를 대표하는 두 작가의 차이는 18세기 전반 정선이 활동했던 영조시절과 18세기 후반 김홍도가 활약했던 정조시절과의 문화감각의 차이를 시사하는 것이어어 흥미롭다. 그리고 정선식 산수형식이 퇴조하는 가운데 19세기에는 김홍도화풍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됐다. 봉건사회 해체기에 근대를 준비하는 문화적 여명이 그렇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호(전남대교수·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