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회사는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고 위험을 집단적으로 보완하는 일종의 계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보험회사는 대부분 주식회사가 아닌 상호회사 형태로 조직됐다. 독일 일본 등 상당수 국가에서는 아직까지도 상호회사가 보험회사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이다. 미국의 최대 생보사인 프루덴셜생명도 상호회사이다. 이사회 멤버 22명 중 16명은 보험계약자의 직접투표에 의해 임명되고 나머지 6명도 법원이 선임한다.
▼남의 돈 제멋대로 사용 ▼
최근에 이르러서는 보험회사의 조직 형태가 주식회사로 전환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단 주의할 것이 있다. 보험회사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고 하더라도 보험회사의 상호회사적인 성격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근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미국 프루덴셜생명도 일반인들을 상대로 주식을 공모발행하지 않고 1100만명 보험계약자에게 주식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주주 이외에 보험계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 예를 들면 보험계약자의 집단소송권 등을 갖추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는 보험 계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장치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삼성생명은 구제불능의 부실기업인 삼성자동차에 대해 무려 5400억원을 대출했다. 이것은 현행 보험감독규정에 의한 동일인 대출한도를 꽉 채운 액수이다. 특히 3월22일 대우와의 빅딜 합의 이후에도 1500억원의 신용대출을 추가로 집행했다. 삼성자동차를 법정관리로 처리하기로 한 이상 이 모든 것이 회수불가능한 부실대출이 됐고 결국 보험계약자에게 전가됐다. 보험계약자에 대한 배임행위 그 자체이지만 삼성생명은 현행 규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변한다.
한국의 보험업 관련규정에서 상호회사적인 성격을 가미하고 있는 유일한 항목은 잉여금의 분배에 관한 것이다. 즉 잉여금 발생시 그 전액을 주주에게 배당하는 일반 주식회사와 달리 보험회사는 상당부분을 보험 계약자에게 배당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보험계약자와 주주 사이의 유배당보험손익 분배비율은 70 대 30이었다가 최근 85 대 15(지급여력비율 8% 이상인 생보사)로 개정됐다.
삼성생명은 총자산 35조원에 대해 자본금은 936억원(0.27%)에 불과한데 주주에게 수익의 30% 또는 15%를 분배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더군다나 지급여력비율 8%의 생보사라면 경영개선 조치가 발동되는 부실 생보사이다. 공적자금, 즉 국민 세금이 투입될 부실생보사에 주주배당이라니 이 무슨 망발인가?
▼국민에 대한 기만행위 ▼
또한 삼성생명의 자본잉여금 및 이익잉여금을 합친 자본총액은 7000억원인데 그 상당부분이 과거 두차례의 자산재평가에 따른 차익이다. 선진국에서 생보사는 자산재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자산재평가 차익의 상당 부분을 주주가 갖는 것은 생보사의 성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보험계약자와 주주간 배당 분배비율과 자산재평가 결정과정의 불합리성을 감안할 때 삼성생명의 1주당 가치가 70만원이라고 한 이건희회장의 주장은 보험계약자와 국민에 대한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설령 삼성생명의 주식을 상장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자본이득 중 주주몫은 0.27%(총자산 35조원에 대한 자본금 936억원의 비율)를 초과해서는 안되며 나머지는 보험 계약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결정을 통해 이건희회장은 삼성자동차 처리와 삼성생명 상장이라는 두가지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재벌개혁의 참뜻이 무엇인가. 총수가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후진적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삼성자동차 처리 방식이야말로 총수와 정책당국이 밀실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따라서 재벌개혁에 결정적으로 역행하는 조치이다. 총수가 존재하는 한, 특히 총수가 금융기관을 지배하는 한 국민에 대한 배임행위와 기만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