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디즈레일리는 ‘유태인은 결코 총리가 될 수 없다’는 벽을 뛰어넘고,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 출신은 결코 총리가 될 수 없다’는 금기(禁忌)를 깨뜨리며 총리가 됐고, 미국의 케네디는 “가톨릭 교도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겨내고 대통령이 됐다.
★ 대통령사과 효과 의문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역시 호남의 한계를 극복하고 집권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부문들에서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신적 격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민련의 뒷받침으로 승리했기에 공동정권으로 출발한 때문인지 처음부터 국정운영에 혼선이 잦았다.
그런 가운데도 외환위기의 극복, 4강외교를 통한 대외 신인도의 회복 같은 치적을 쌓았음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특히 올해들어 ‘에러’가 계속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수습이 안이했던 탓에 겨우 집권 2차연도에 들어선 시점에서 위기에 빠졌다.
왜 이렇게 빨리 난국이 조성됐을까? 연초의 ‘검란(檢亂)’ 때 수습의 큰 방향을 개혁쪽으로 잡았어야 옳았는데 거기서 실기(失機)하면서 고관집 거액 도난사건, 연금 및 의료보험 파동, 3·30 재선거 50억원 사용설, 고급 옷 로비 추문,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 2만 달러 격려금 사건 등이 잇따르자 대다수 국민이 노골적으로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서해 교전 사태에 이어 금강산 관광객의 억류사건마저 일어나자 그동안 잠재했던 대북정책에 대한 의아심이 불거져 나오게 됐다.
이렇게 볼 때 내년 16대 총선에서 집권세력에 경고장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도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부―여당이 뒤늦게나마 위기를 느껴 대통령의 ‘사과’를 시발로 이런저런 대책으로 민심을 다듬고 있으나 효과가 나타날지 의문스럽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정부―여당이 정권 위기는 느낀 것 같은데 국가 위기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다는 데 있다. 고질적 지역 갈등은 더욱 깊어져 가며, 대기업의 구조조정과 노사관계의 안정화 등의 과제에서는 여전히 원점에서 맴도는 가운데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면서 서민층의 좌절감은 커지고 있다.
남북관계의 경우, 북에 대해 지금처럼 계속해서 많은 돈을 주면서도 ‘뺨 맞는 짓’을 참고 지내는 것이 과연 국가의 안전이나 한반도의 평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회의하게 된다. 금강산 관광 사업 하나만 놓고 따져도 매일 최소한 5억원을, 계산하기에 따라서는 7억원을 북한에 주고 있으며 앞으로 몇 해 동안 그렇게 할 셈인데, 그것을 어차피 치러야 할 우리의 ‘안보 비용’ 또는 ‘통일 비용’으로 치부하는 것으로 자위해도 괜찮을까?
★ 초당파적 자세 필요
국가기강의 해이도 큰 문제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독립을 놓고 서로 싸웠으니 어찌 치안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여기저기서 “공권력은 어디로 갔느냐”는 원망이 쏟아져 나온다. 어린이를 포함해 23명이 안타깝게 숨진 참사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부패는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특히 정치자금과 관련해 듣기 민망한 얘기들이 여기저기 나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통령의 아들이 아무리 합법적이고 투명성이 있다고 해도 국회의원의 자격으로 후원회를 열어 4억원 정도의 후원금을 받았다는 기사에 접한 독자들의 심경은 착잡하다.
하필이면 비슷한 시점에 공무원의 경조금 접수를 금지시켰으니 공무원들은 공무원들대로 반발하게 됐고 공직사회가 흔들릴 수밖에. 당황한 여당이 앞장서 겨우 일부 규정을 고치는 것으로 달래고 있으니 정부의 체통만 깎여버렸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국민이 야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건전한 반대 세력으로서보다는 발목잡는 훼방꾼으로 때때로 비쳤기에 야당에 대해서도 믿음을 주지 않는다.
여야당 모두에 실망하는 현실이 또 하나의 국가적 위기가 아닐까. 정부―여당은 내년 총선의 승패, 그리고 차기 정권의 향방에 너무 신경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차라리 총선에 패배해도 좋고 차기 정권을 놓쳐도 좋다는 각오로, 그리하여 국가의 위기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초당파적 자세로, 자를 부분은 과감히 자르면서 국정에 임하면 반드시 국민의 믿음이 되살아나 살 길이 열릴 것이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 총장)h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