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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향기]마종기「박꽃」

입력 | 1999-07-04 18:37:00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 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시집 ‘이슬의 눈’(문학과 지성사)에서

희디흰 박꽃을 눈 앞에 두고 부자지간이 앉아 있는 밤. 그들이 나누는 한마디.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꽃의 나머지 이야기는 무엇이었기에 그 밤에 아버지는 문득 눈물을 훔치셨을까.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이 다가오는 언젠가 나도 몰래 눈물을 훔치며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을까. 이제 그만 들어가 자라고.

신경숙(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