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두 살의 젊은 선비가 과거를 준비하다가 문득 산수유람을 떠나고 싶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친척 아저씨가 도봉산 산행을 제안하자, 뜻을 크게 하고 안목을 높이기 위해서는 도봉산으로 만족할 수 없다며 금강산여행을 결심했다. 이 젊은 선비는 고종 때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우석 이풍익(友石 李豊瀷·1804∼1887)이다.
그는 이미 6대조이자 조선시대 명문장가로 꼽히는 월사 이정귀(月沙 李廷龜)의 금강산기행문을 읽고 그곳에 무척 가고 싶어했다. 이풍익은 ‘돌과 벗한다’는 아호 ‘우석(友石)’처럼 자연을 즐겼고, 서(書) 화(畵) 금(琴) 검(劍) 거울 벼루 등 여섯가지를 일컫는 6완(六玩)이라는 당호(堂號)를 쓸 정도로 골동 취미도 각별했던 모양이다.
이풍익은 22세 때인 1825년 8월4일(음) 머리 속에 가을 풍악을 그리며 아저씨와 함께 서울 혜화문을 출발했다. 당시첩(唐詩帖) 몇 권과 종이와 붓, 벼루만을 챙긴 행장은 단촐했다.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날이 9월2일이니 29일간의 대장정이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그때 그때 쓴 기행문과 시를 정리하고, 여기에 해금강부터 단발령까지 28폭 금강산 명승도를 곁들여 10권으로 꾸민 서화첩이 바로 ‘동유첩(東遊帖)’이다.
첫권에는 1838년 그의 선배인 두계 박종훈(荳溪 朴宗薰·1773∼1841)이 서문을 썼고, 1844년에 호산 박회수(壺山 朴晦壽·1786∼1841)가 발문(跋文)을 붙였다. 이로 미루어 서화첩의 완성은 금강산 여행 10여년 후의 일로 보인다.
단발령에서 시작해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순으로 이동하는 일반적인 코스와 달리 이풍익의 여정은 영평을 거쳐 회양에서 통천으로 돌아 해금강 외금강 내금강 단발령의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금강산의 정기가 젊은 선비의 학문을 북돋우었는 듯, 이풍익은 여행을 다녀온 4년 뒤 대과에 급제해 정9품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로 벼슬길에 나섰다.
‘동유첩’은 현재 한 권이 유실된 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3권은 서문과 기행 시서첩(詩書帖)이고 4∼10권이 기행문과 그림을 함께 배열한 서화첩이다. ‘동유첩’에 포함된 그림은 해금강의 ‘총석정도(叢石亭圖)와 그 근처 ‘환선정도(喚仙亭圖)’, 외금강의 ‘신계사도(神溪寺圖)’ ‘옥류동도(玉流洞圖)’‘연주담도(連珠潭圖)’‘구룡폭도(九龍瀑圖)’, 내금강의 ‘표훈사도(表訓寺圖)’‘만폭동도(萬瀑洞圖)’‘진주담도(眞珠潭圖)’‘내금강전면도(內金剛全面圖)’‘장안사도(長安寺圖)’‘단발령도(斷髮嶺圖)’ 등 치밀한 먹선묘에 맑은 담채를 살짝 얹은 금강산 실경도들로 풍악의 정취가 가득하다.
김홍도식의 실경 포착법,사선식 구도, 필묵법 등을 따르고 있어 화면이 낯설지 않다. 가을 금강산경의 분위기를 아담한 크기의 화첩에 담은 깔끔한 그림들이다.
‘동유첩’금강산도들은 아마추어 선비화가의 솜씨가 아니다. 아마추어의 솜씨로 보기에는 너무 정교하다. 김홍도의 금강산화첩을 베끼다시피 한 것이다. 이풍익이 ‘동유첩’을 제작하면서 화공에게 그려 달라고 주문한 것 같다. 이 때 김홍도식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한 듯하다. 이풍익이 여행을 통해 직접 본 경치와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이 가장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신계사도’의 경우 당시의 가람 형태를 비교적 소상히 보여준다. 최근 외금강의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이 그림이 좋은 참고 자료가 될 듯하다.
또한 이 서화첩의 ‘비봉폭도(飛鳳瀑圖)’를 보면, 화면 가득 채운 폭포와 층층이 쌓인 암반의 바위결, 잡목의 세세한 점선 묘사가 고스란히 김홍도식 화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볍게 모사했기에 비봉폭 암벽이 얇아진 느낌을 준다. 남의 그림을 베끼면서 드러난 표현력의 한계도 없지 않지만, 풍경의 세세한 설명적 묘사는 단순히 모사그림으로만 그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봉폭은 구룡폭에 오르기 전에 만나는 139m 높이의 폭포이다. 구룡폭의 두 배 길이지만 ‘봉황이 나는’이라는 이름처럼 물이 갈라져 떨어지고 수량이 적어 웅장미는 부족하다. 비봉폭은 여름보다는 폭포물이 얼어붙은 겨울에 오히려 더 장관이었다.
사실적이고 설명적인 묘사가 이 서화첩 그림 속에 나타난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전통회화 속에 들어있는 근대적인 화법의 주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금강산이 최고처였던 것은 그 비경의 청정함에 있다. 조선초부터 금강산 유람시와 기행문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그림을 놓고 방안에 누워서 즐긴다는 뜻의 와유(臥遊)의 문화는 조선후기에 본격화되었다.
이 전통에 따라 시(詩) 서(書) 화(畵)를 함께 첩으로 꾸미는 풍조는 이풍익의 ‘동유첩’에 와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태호(전남대교수·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