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계약의 공범(共犯)들
회사원 P씨(35)는 최근 서울 강남의 1억8000만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P씨가 작성한 매매계약서는 두 장. 하나는 자신과 집주인, 공인중개사 등 세 명만을 위한 진짜 계약서.
또하나는 매매금액 1억원이라고 적은 세금용 가짜 계약서.
P씨와 집주인은 진짜와 가짜 사이의 차액인 8000만원에 대한 취득세와 양도세를 탈세한 것.
공인중개사도 복비는 실제 거래가를 기준으로 받으면서 신고는 가짜 금액으로 하는 공범인 셈이다.
“탈세가 아니라 절세(節稅)로 봐야 한다. 계약내용을 곧이곧대로 신고하는 사람만 바보다. 정부도 이런 현실을 다 안다”는 게 부동산업자들의 ‘당당한’ 목소리다.
대규모 건설회사의 K이사는 얼마 전 중견업체 사장으로부터 “특수건물을 짓는 1000억원짜리 공사계약을 당신 회사와 체결할테니 100억원의 비자금을 만드는 일을 도와달라”는 달콤한 제의를 받고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한마디로 계약서류에는 1100억원으로 적고 세금 정산이 끝나면 100억원을 몰래 돌려달라는 유혹.
K이사는 “만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나 하며 망설이는 사이에 그 업체는 다른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건설업 하청업체 사장 이모씨(47). 지난해 말 거래업체의 담당 간부가 은밀히 그를 찾아왔다.
그 간부는 “2억원짜리 계약이 성사되면 4500만원을 나에게 달라. 당신은 손해 안 보게 해주겠다. 내가 공사 감독이니 시공을 제대로 안해도 눈 감아 주겠다”며 압력을 넣었다. 이씨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공범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세청 관계자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이같은 탈세계약은 당사자의 고발이 있기 전에는 사실상 적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공직부패의 온상
전남도청이 올해 발간한 ‘공직사회 부패고리 근절을 위한 300대 사례집’에는 위법부당한 분할수의계약이나 특정업체봐주기 특혜성계약 등 계약분야와 관련된 부패사례가 총 35건에 이른다.
이는 환경위생분야(41건), 예산회계분야(36건)에 이어 세무비리(35건)와 함께 공동 3위에 해당하는 수치.
대한건설협회가 발간하는 ‘월간건설’이 최근 420개 건설회사를 상대로 ‘가장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건설관련 제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입찰 및 계약제도’가 62.9%로 압도적 1위.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실내장치업을 하고 있는 이모씨(50)는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문가. 그러나 그는 “10억원 이상의 큰 계약은 절대로 실력만으로 안되더라.
객관적으로 형편없는 업체가 수의계약으로 거액의 공사를 따내는 걸 너무 많이 봐왔다”고 털어놓았다.
감사원 권오돈(權五敦)회계교육과장은 “입찰 등 계약제도를 개선하면 다시 이를 악용하는 수법이 보다 앞서가는 현실이다. 잘못된 계약은 부실공사 등으로 이어져 국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고 말했다.
◆투명해야 살아남는다
지난 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뇌물방지협약’이 발효됐다.
국제상거래 질서를 왜곡시키는 부패한 관행에 대한 최초의 국제규범인 셈. 정부도 지난해 말 이 협약의 이행법으로 ‘국제상거래뇌물방지법’을 제정, 공포했다.
부패학 전문가들은 “투명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냉험한 국제경쟁에서 신용을 얻을 수 없고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계약과 거래를 통해 신용을 쌓아간다. 그 계약내용과 거래액이 바로 개인에 대한 신용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상호 믿음의 표현인 계약을 지키지 않거나 악용하면 평생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계약을 탈세와 비자금 조성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는 실정이다.
사회발전 시스템연구소 지만원(池萬元)박사는 “부패척결을 위해서는 금융실명제보다 거래실명제가 더 중요하다. 거래은행을 통해 모든 자금의 수급이 이뤄진다면 신용의 기록화가 가능하고 부패방지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바른경제동인회 박종규(朴鐘圭)부회장은 “계약과 거래 내용이 상호검증돼야 투명하고 합리적인 계약문화가 이뤄진다”고 강조한다.
그는 “정부가 신용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나선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잘한 일”이라며 “카드 거래가 늘면 무자료거래가 줄고 현금유통도 축소돼 비자금같은 부패한 돈이 설 땅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경실련도 예산감시 차원에서 정부회계분야에 복식부기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야만 각종 정부계약이나 예산집행에 대한 교차 자료가 확보돼 신뢰성이 있는 검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