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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하희선/장기기증은 사랑입니다

입력 | 1999-07-15 19:12:00


땅위에 있는 만물이 초록의 생기를 띠는 계절이다. 그러나 계절에 대한 느낌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과연 죽음의 문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현장에서 7년 동안 1500여명의 장기이식 환자들을 지켜봤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92년 이맘 때의 첫수술이었다. 오랫동안 말기 간경화로 계속적인 통원 치료와 입원을 거듭하며 투병하던 환자가 더이상 치료방법이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남은 가족들을 위해 삶을 정리하다가 마침 불의의 사고로 뇌사판정을 받은 군인의 어머니가 아들의 장기 기증에 동의함에 따라 환자는 성공적으로 간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활동하는 그 분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의 업무는 장기이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중간에서 조정하고 장기 기증자와 이식 수혜자의 관리를 담당하는 것이다. 과거 가족간에만 장기이식 수술이 이뤄지던 것에서 90년대 들어 뇌사자 장기기증이 활성화하면서 장기이식 코디네이터가 생겨났다.

한국에 10여명밖에 안되는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들은 대부분 의학적 지식과 임상경험이 풍부한 간호사들이 맡고 있다. 나 역시 10년간의 간호사 경력을 토대로 이 일을 시작했지만 장기이식 코디네이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책임감과 인내심, 원만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일의 성격상 휴일이나 명절, 한밤중에도 연락만 받으면 바로 병원으로 뛰어나가야 하는 24시간 대기 상태. 남들처럼 휴가를 챙긴다는 것도 꿈도 못꾼다. 매 순간 응급상황에서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야 하는 일 등….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은 두 번 죽이는 일이라 믿는 관습 때문에 장기 기증이란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비록 기계에 의한 것이지만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며 여전히 호흡을 하는 사랑하는 가족이 더이상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남은 가족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뇌사자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없기에 장기기증을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힘들게 장기기증을 결정한 후에도 때로는 주위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한다. 대도시나 서울로 환자를 이송한다든지, 뇌사판정을 위해 객지에서 며칠간 기다려야 할 때 가족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마지못해 삶을 이어가던 환자들이 새 삶을 찾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온갖 고통은 눈녹듯 사라진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기쁨의 뒤안길에는 신체 일부를 가족이나 이웃에게 나누어 준 기증자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과 어려움을 이기고 장기 기증을 결정한 가족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올해 초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해 내년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이제 뇌사를 법적으로도 인정하게 되는 것이며 뇌사자의 장기기증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꺼져가던 생명이 불씨처럼 되살아 난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몫을 하기 위해 남은 인생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지금도 수많은 말기 환자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여린 촛불과 같은 삶을 이어간다. 이 세상에 왔다 가면서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신체의 일부분을 남겨 빛과 생명을 줄 수 있다면 삶은 그만큼 연장되는 것이 아닐까?

하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