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부들이 듣는 흔한 인사말 중에 단연 으뜸은 ‘얼마나 바쁘시냐’는 거다. ‘바쁘실 텐데 간단히 말씀드리겠다’‘바쁘지 않은 날이 언제냐’‘우리 신부님은 하는 일이 많아 늘 바쁘시다’는 등 말을 들으면 괜히 얼굴이 뜨뜻해진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유난히 바쁜 날, 바쁜 때가 있게 마련이지만 매일같이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니까. 어떤 이는 신부들의 사정을 잘 이해한답시고 ‘신부는 한가하면 못 쓴다’ ‘한가하면 잡생각만 난다’고 점잖게 충고도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이 고맙지 않다.
▼나는 한가한게 좋아▼
늘 바쁘게 일하는게 무슨 흉이야 되겠는가마는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날수나 시간 못지 않게 일손을 놓고 무료하달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내는 날이나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쉬는 시간이나 휴일 또는 휴가를 말하는게 아니다. 평소에 해야 할 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빈둥거려도 좋을 시간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물어도 바쁘다는 말은 하지 않게 되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밤낮 없이 뼈빠지게 일을 해도 한 식구 입에 풀칠할까 말까 한데 일거리가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일이 없어 온종일 공원 벤치 신세를 져야 하는 실직자들이 들으면 머리 꼭대기까지 열받을 노릇 아닌가.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턴가 ‘바쁘다’는 말이 ‘잘 나간다‘ ‘능력 있다’는 뜻으로 통하고 ‘바쁘지 않다’ ‘시간 있다’는 말은 오히려 ‘인정도 못받는다’ ‘백수건달이다’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으니 ‘바쁘지 않은 게 좋다’는 말을 함부로 할 것도 아니지 싶다.
아뭏든 누가 뭐래도 나는 바쁘지 않게 살기를 바라지만 바빠서는 절대로 안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나 일에 대해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작게는 한 가정으로부터 크게는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구성원 전체의 행불행(幸不幸)과 흥망이 좌우될 수 있는 그 사람의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따라서 그의 결정이나 판단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긴 시간과 깊은 묵상이 절실히 요구된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래도 즉흥적이고 가벼운 결정은 하자가 있게 마련이며 오류의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인 자격도 갖추지 못한 결정권자는 논외로 한다. 그로 인하여 지난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행을 겪었는가.
아랫사람일 수록 독자적인 판단력은 크게 필요치 않다. 반면 위로 올라갈 수록 올바른 판단력이 요구되고 바로 그 때문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며, 또한 바로 그 때문에 무슨 일에든 바쁘게 쫓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가장 시간적 여유가 많고 바쁘지 않아야 할 사람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꼽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가 제일 바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사건건 모든 일이 다 그의 손을 거쳐야 하고 그와 만나야 해결이 된다고들 하니 말이다. 무슨 수로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 다 참석해서 손수 챙길 수 있나. 그것이 TV나 신문에 나야 국민들이 좋아 한다니 그것도 문제다. 다른 사람이 대신 좀 하면 안될까. 대통령이 수면시간까지 줄여야 할 만큼 바쁘다면 그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여유에서 옳은 판단이▼
임창열(林昌烈) 주혜란(朱惠蘭) 경기도지사 부부가 한발 앞서 돈을 먹고 감옥에 가 있는 여러 선배(?)들의 뒤를 시간차도 두지 않고 곧바로 따르는 것을 보고 난 이렇게 생각했다. “아 복잡한 수도권 지역의 책임자란 얼마나 일이 많은 사람인가. 주어진 업무만도 감당키 어려울 텐데 부부가 따로 따로 아무도 모르게 돈 받고 입 닦으려면 얼마나 바빴을까. 그렇게 바쁘니 신중하지 못했을 수밖에….”
한국 고등학생만큼 해야 할 공부가 많아 바쁜 청소년들이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노벨상 하나 타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다 정신 못차리게 바빠야 개인이나 나라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이 사회 각계 각층의 크고 작은 책임자들이 명심해야 할 일이다.
호인수(인천 간석2동 천주교회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