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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금강展/임용연과 배운성]수묵전통 유화

입력 | 1999-07-21 18:47:00

배운성의 '총석정도'


300년 전 겸재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몽유금강전’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다. 20세기에 그려진 유화(油畵)금강산 그림이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여기 저기 화집을 뒤지고 수소문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고희동(高羲東)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 유학을 통해 유화를 배워오고,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들이 많이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화 금강산 그림이 지극히 미미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 금강산을 그린 확실한 유화 작품으로는 1940년작 임용련(任用璉·1901∼?)의 ‘만물상 절부암도(萬物相 折斧岩圖)’와 1940년대 작품인 배운성(裵雲成·1901?∼?)의 ‘총석정도(叢石亭圖)’가 선보인다.

임용련의 그림은 만물상 안심대에 오르다가 뒤돌아 본 절부암쪽 풍광을 담은 것이다. 절부암은 나무꾼이 하늘에 오르는 선녀를 붙들기 위해 도끼를 휘둘렀는데 이로 인해 바위에 자국이 생겼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바위 틈에 나있는 도끼자국같은 큰 구멍이 여성의 성기처럼 보인다고 해 옥녀봉(玉女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작가가 1940년 친구의 결혼기념으로 그려준 그림이었다.

‘만물상 절부암도’는 두툼한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엷게 펴 발라 가볍게 그린 인상주의풍 풍경화이다.

이 작품을 본격적인 유화 금강산 사생화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짙은 갈색과 연한 땅색의 근경은 가을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다. 시커먼 절부암과 그 너머 녹청색 관음연봉의 안개처리는 수묵화의 맛을 동시에 살려내고 있다. 의식적으로 전통적 회화형식을 차용했다기보다, 금강산의 절경이 자연스레 새것과 옛것을 적절히 조화시켜 준 것이다.

임용련은 젊어서 미국에서 미술학교를 다녔고 파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 당시로서는 신세대 화가였다.

귀국 후 서울을 떠나 평안도 정주에 있던 민족교육의 터전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그 곳에서 미술과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유화 ‘만물상 절부암도’는 미국서 작곡을 공부했던 동료 음악교사 김세형(金世炯)의 결혼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지금은 희미해져 있으나 캔버스 뒷면에 ‘축 화혼(華婚) 김세형 선우신영(鮮于信永)선생, 임용련 백남순(白南舜) 근정(謹呈)’이라고 먹으로 써놓았다. 임용련의 부인 백남순 역시 여류화가였다.

배운성의 ‘총석정도’ 역시 전통회화의 구도법과 전혀 다르면서도 전통적 형식과 친화성을 지닌 작품이다.

바다와 하늘과 어울린 총석정의 언덕풍광을 보이는 그대로 포착했다. 총석들의 언덕 위에 정자와 솔밭을 배치하고, 육모형 총석 덩어리의 윗머리 부분을 강조한 점은 옛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시각이다.

그리고 두텁게 바른 유화의 질료감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해내, 인상주의 화풍보다는 고전주의 풍을 짙게 풍긴다. ‘총석정도’는 배운성이 자주 드나들던 병원의 주치의에게 선물한 것이라 전한다.

배운성은 유럽에서 유화를 공부하고 20년 가까이 활동했던 작가. 1940년 9월에 귀국해 1944년 첫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배운성과 임용련은 모두 해방과 전쟁시기에 활동 근거지를 북쪽으로 옮긴 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작품을 대하면서 유화가 국내에 새롭게 소개돼 작가층이 두터워졌음에도 금강산을 그린 사람이 왜 이처럼 적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을 훑어보면, 오히려 일본인 화가들의 금강산 그림이 많다.

아무튼 국내작가 중 서양화를 배운 작가들이 금강산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은 전통회화를 낡은 것으로, 곧 금강산은 전통적 형식의 그림에나 어울리는 산으로 치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양화가들이 일찍부터 금강산을 그렸다면, 전통형식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새로 유입된 유화재료의 특성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데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도 두 유화 금강산 그림은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20세기 후반 남쪽의 금강산 그림은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과 비민주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소정 변관식과 고암 이응로에 의해서 그 맥락이 끊어지지 않았을 뿐, 이 시기 금강산 그림은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음악에서는 금강산을 민족의 꿈과 염원을 담은 영산(靈山)으로 노래한 ‘그리운 금강산’이 있는데 반해, 미술에서는 성과가 이토록 미미하리라고는 전시를 준비하기 전까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우리시대의 금강산 예술을 만들어낼 것인가’하는 과제가 남는다.

만약 후손들이 금강산을 통해 이룩한 우리시대 문화예술의 수준을 평가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번 일민미술관이 ‘몽유금강전’의 하나로 기획한 현대작가 15명의 전시에 더욱 무게가 실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