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다난한 현대사 속에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며 그 물결에 휩쓸려 간 이름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일본인이 이름 붙인 종군 위안부, 강제연행자, 피폭자….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23명이 처형되고 125명이 징역형을 받아 청춘이 부서져나가야 했던 한국인 B, C급 전범(戰犯)도 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함께 버림받고 잊혀져 가는 이들 전범을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그 진상을 파헤쳐 가는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교수가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갔다. 그녀는 일본 군속(軍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며칠을 지방에 머물기도 했다.
한국인 B, C급 전범이란, 전쟁을 일으킨 중대범인으로 책임을 물었던 ‘도쿄재판’의 A급 전범과는 달리 각국의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포로감시 요원으로 징집된 20대 청년들이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다. 3223명의 한국인이 군속으로 포로감시 요원이 되어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과 비행장 건설 등에 투입된 연합군 포로의 감시를 맡았던 것이다.
중노동 기아 열악한 환경에 연합군 포로들은 쓰러져갔고 이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한국인 군속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이들은 포로학대라는 죄목으로 전범으로 몰린다.
이들의 비극은 사형수 조문상(趙文相)이 남긴 일기에서 더욱 참담하게 각인된다. 그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절망의 심연에는 고통이 없다. 이 속세의 모든 것에 절망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은 안심한다’라고 사유했던 인텔리였다. 그가 남긴 유서는 ‘이 세상이여 행복하거라’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때 그는 26세였다.
개성에서 태어나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그는 군속으로 나가면 전장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고, 돌아오면 순사보다 높은 지위가 주어진다는 판단과 젊어서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충동 속에서 지원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47년 싱가포르의 창이 형무소 임시 교수대에서 자신의 이름조차 찾지 못한 채 히라하라(平原)라는 일본 이름으로 죽었다.
징역형을 받은 한국인 전범들은 57년 마지막 한 사람이 출소할 때까지 동남아와 일본의 형무소를 전전해야 했다. 일본인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일본인 전범으로 처형되거나 형을 살아야 했던 이들을 일본은 외국인이라면서 보상에서조차 제외한다. 일본인 전범, 사형자들에게 가족원호법과 은급법(恩給法)에 따라 조위금 유족연금 및 은급을 지급하였지만 이들만은 제외시켰던 것이다.
더러는 자살하거나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기억상실증에 빠지기까지 하면서 이들은 말 그대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질식해 갔다. 피나는 투쟁을 벌이며 일본에 정착한 전범들에게 훗날 일본정부가 베푼(!) 것은, 한 사람당 5만엔의 돈과 도영(都營)주택 우선 입주권, 그리고 택시 10대의 영업허가였다. 이렇게 시작한 ‘동진택시’가 지금도 도쿄(東京) 거리를 달린다.
그때 군속으로 끌려갔던 한국인 가운데는 반일운동을 펼친 김주석, 후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 되어 그곳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양칠성,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 일했던 많은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식민지 말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졌던 의식의 혼란이 그것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소리친 것이 “대한독립 만세”와 “천황폐하 만세”였던 사형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 청년의 의식 속에서 천황폐하와 대한독립이 공존했던 가치관의 난마(亂麻)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일본의 대중음악그룹 ‘X 저팬’의 음반이 100만장 넘게 팔려나가고, 대학의 애니메이션 동아리들이 앞다투어 일본 만화영화를 틀어대는 속에서, 또 일본과의 쓰라린 기억을 되살려야 할 8월이 오고 있다.
과거는 사라져간 것이 아니다. 낡고 색이 바래지도 않았다. 화석처럼 굳어져 있을 뿐이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