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의 사무실에 갈 때마다 벽에 걸린 그림이 퍽 맘에 들었다. 간혹 만나는 화가의 그림이란다. 그 선배가 그 화가의 화실에 문인 한 둘과 놀러 가기로 하였다며 같이 가자고 전화를 했다. 약속한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밤늦게 화실에 도착하니 화가가 포도주를 내놓는다.
계속되는 재판, 회의로 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그런 자리에 함께 하면 모질어진 마음의 굳은 살이 풀어진다. 요사이 조울증에 빠졌다는 선배가 한 문인에게 마지막 울어본 것이 언제냐고 묻는다. 문인은 글쓰는 사람답게 매일 운다고 말한다. 자기 일로 우는 게 아니고 책, 영화 그리고 연속극을 보다 운다고 한다. 심지어 신문을 보다가 운다니 남의 불행에 끼여들어 밥벌이를 하는 속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다. 나는 무엇을 보며 우는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보다 운 것이 책때문에 운 마지막 기억이고 이후로는 모두 영화때문이었다.
영화관은 내 눈물의 유일한 해방구다. 어둠을 틈타 실컷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 영화의 무엇이 나를 울게 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면서는 눈물샘이 마를만큼 울었다. 그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그저 그런 영화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저 전태일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울었다. 10여년전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평전’을 보면서도 울었는데, 어렴풋이 어떤 다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보며 공장으로 가버린 대학선배와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던 씩씩했던 노동자들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지키지 못한 다짐과 내 헝클어진 삶을 혐오했다. 그 눈물은 기껏해야 자기연민이었겠지만 이 누더기같은 영혼이 세상에게 무엇을 양보했고, 무엇을 아직 내주지 않았는지를 알게 했다.
조광희(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