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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조유전/신계사 복원 南北 지혜 모아야

입력 | 1999-07-29 18:38:00


금강산 관광이 시작될 때부터 신계사(神溪寺) 터에 관심이 많았다. 금강산 관광선의 기항지인 북한 장전항에서 버스를 타고 온정리를 지나 수령 수백년이 넘은 미인송 숲 사이를 5분쯤 달리다보면 오른편에 신계사 터가 보인다. 외금강의 절경을 양 옆구리로 끼고 있는 신계사 터에는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3층 석탑과 부도, 대웅전의 주춧돌만이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쓴 채 남아 있다.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6년(519년)에 창건돼 6·25전쟁때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1400여년을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이다. 북한은 신계사 터를 국보 95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나는 30년 넘게 고고학 외길을 걸어왔다. 신라와 백제문화를 대표하는 황룡사터 미륵사터와 공주 무령왕릉, 경주 천마총, 경주 감은사터 등을 발굴했다. 가장 보람있었던 발굴은 황룡사지 발굴이었다. 일본인 학자에 의해 왜곡됐던 가람(伽藍) 배치를 우리 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와 북한 당국이 협의해 곧 신계사 복원 공사가 시작될 전망이다. 한국 문화유산의 관리보존을 담당하는 문화재청이 배제돼 유감이지만 북한 당국이 한국 기업과 협의해 신계사를 복원하려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가 크다.

문화유산을 복원하기에 앞서 학술적인 조사가 따라야 한다. 신계사가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법통을 이어오다 없어졌기 때문에 복원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시기의 건물에 초점을 맞춰야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도 왜군의 방화로 소실됐으나 1597년 강원감사 황융중이 중건하는 등 여러차례 중건을 거듭했다. 당시 설계도가 남아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어느 시기를 불문하고 사찰의 설계도가 남아 있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땅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을 찾아내 그것을 토대로 복원 해야 한다.

경주에 있는 신라 황룡사터에서는 8년여 학술 발굴조사를 통해 6세기 중엽에 창건해 고려시대 몽골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700여년을 이어오며 적어도 6차례의 건물 변화가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1400여년을 이어온 신계사 역시 건물들의 변화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지하에 남아 있을 흔적을 찾아내야 하고 이를 위해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정밀 발굴조사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신계사를 복원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나온 보도만을 놓고 보면 복원 규모와 양식을 신라에 맞출 것인지, 고려 아니면 조선시대에 맞출 것인지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발굴조사를 통해 지하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유구(遺構)를 찾아내고 거기에서 얻어진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복원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철저한 고증이 없는 복원은 지하에 남아 있는 민족의 문화유산을 인위적으로 말살하는 행위다. 신계사 복원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비록 70년대 북한에서 발굴조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민족문화유산을 복원하기에 앞서 먼저 남북의 전문가들에 의한 공동 발굴조사가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사라진 문화유산을 복원해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조유전(국립문화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