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선교사이자 고종황제의 외교 조언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 그와 한국 대통령과의 약속이 50년만에 실현됐다.
약속은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헐버트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그의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의 헐버트묘비를 보면 묘비명이 중간에 끊겨 묘비 가운데가 휑 하니 비어 있다. 바로 이대통령의 글씨를 새겨넣어야 할 자리. 이 땅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한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이 빈자리에 이제 김대중대통령의 글씨를 새겨 넣게 됐다. ‘헐버트 박사의 묘’. 이 일곱 글자를 새겨넣는데 50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
헐버트는 1905년 을사조약 직후 그 부당성을 세계에 알렸고, 1907년 고종에게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평회회담 밀사 파견을 건의했다가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당했던 인물. 그는 49년 한국을 찾았다가 일주일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후 ‘헐버트박사 장의위원회’가 구성돼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시신을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묘비에 그의 출생 사망일시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는 평소 그의 말을 새겨넣었다.
이번 결실엔 헐버트기념사업회(회장 신복룡 건국대교수)의 집행위원장 정용호씨의 10년에 걸친 노력이 숨어 있다. 정씨는 그동안 청와대에 수차례 청원을 해왔다. 그리고 최근 김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숙원사업이 이뤄지게 됐다.
기념사업회는 4일 김대통령의 글씨를 묘비 빈자리에 새겨 넣는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헐버트의 50주기인 5일 오전10시반 합정동 외국인묘지에서 기념식을 거행한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