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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被爆한인위령비'이전 29년간 숱한 우여곡절

입력 | 1999-08-05 18:23:00


일본 히로시마(廣島)시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70년 4월 평화기념공원 바깥에 건립됐다. 이 위령비가 29년 만인 지난달 공원 안으로 옮겨지기까지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류 사상 최초의 원폭피해지로서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는 히로시마시가 이 비의 공원내 이전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위령비는 ‘민족차별의 상징’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남과 북이 대립할 때도 있었다.

위령비 건립위원회(회장 장태희·張泰熙·86)는 처음부터 공원 내에 비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시는 “공원 내에 새로운 공작물을 세우는 것을 일절 허가하지 않기로 했다”며 거부했다. 조총련도 ‘한국’이라는 국명을 문제삼아 반대했다. 희생자 중에는 ‘조선인’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공원 내에는 다른 비석이나 조각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국민단은 75년 위령비 이전을 시에 요청했지만 역시 거부됐다. 80년대 초반에는 조총련도 공원 내에 ‘조선인 피폭자 추도비’를 세우겠다며 시에 허가를 요청했다. 히로시마시는 “하나로 통일하라”고 요구했다.

92년 민단과 조총련은 통일비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비의 앞면에는 ‘한국인·조선인’이라고 나란히 쓰고 나머지 3면은 합의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전이 없었다. 같은 해 9월 민단은 단독 이설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총련은 합의위반이라며 반발했다. 그 상태로 7년이 흘렀다.

지난해 12월 겨우 돌파구가 열렸다. 히로시마시는 민단이나 조총련이 아닌 별도의 민간위원회가 이설을 요청하면 허가하겠다고 밝혔다.

올 2월 재일한국인 중심으로 ‘위령비 이설위원회’가 결성돼 숙원을 풀게 됐다. 더욱 뜻깊은 것은 1500만엔의 경비 전액이 성금과 모금으로 충당됐다는 점.

이설 완공식에 참석했던 아키바 다다토시(秋葉忠利)히로시마시장은 “위령비 이전을 계기로 일본인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차별의식이나 편견을 없애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