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세계에서 가장 싫은 나라→가깝고도 먼 이웃→아태시대의 동반자.
한국의 20세기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1910)으로부터 시작했다. 일제 식민통치 36년을 거쳐 45년 광복, 그리고 65년 국교수교 후 지난해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일본총리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나오기까지 지난 100년 동안의 한일관계는 상처와 치유, 증오와 화해 등 복합적인 관계가 난마처럼 뒤얽힌 질곡으로 점철돼왔다.
비록 간간이 과거사에 대한 망언(妄言)이 돌출하긴 했지만 한민족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는 일본측의 사죄와 반성도 전혀 진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반성은 ‘통석(痛惜)의 염(念)’(90년 아키히토 천황)에서 ‘통렬(痛烈)한 반성의 뜻’(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으로, 다시 ‘통절(痛切)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98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일 양국 국민이 상대방에 대해 지닌 감정은 복잡한 기복(起伏)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때가 되면 도지는 ‘고질병’처럼 이슈가 터질 때마다 심한 몸살을 앓는다. 독도든, 군위안부든, 망언이든…. 그만큼 역사가 남겨준 상처가 깊고, 그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는데 세월이 얼마나 더 흘러야 할지도 알 수 없다.
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관계는 우선 경제분야에서 긴밀해졌다. 숱한 반대와 비판 속에서도 대일 청구권자금으로 받은 무상자금 3억달러, 유상자금 2억달러가 포항제철을 비롯한 국가 기간산업 건설에 투입됐다.
해마다 양국간의 교역량과 인적교류도 증가해 지난해 교역량은 290억달러, 인적교류는 29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경제예속 심화와 이로 인한 무역불균형 문제는 극복해야 할 양국간의 난제 중 난제다. 97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131억달러, 지난해는 IMF파동의 여파로 수입량이 급격히 줄어 45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한일수교 후 34년 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 총액은 1430억달러에 이른다.
아직도 자본재 주요 품목의 95%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고 국산 상품 100달러를 생산하는 데 일제 부품이 5달러 정도 소요되고 있다.
정치분야에서 양국은 제삼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관계의 경우 협력과 동반자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양국간의 정치적 이슈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돼 왔다.
그러나 대북한 관계쪽으로 눈을 돌리면 양국은 북한이라는 ‘주적(主敵)’을 눈앞에 놓고 철저하게 공조관계를 과시해 왔다. 94년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에서 결정된 북한 경수로지원사업의 경우 일본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이사국으로 참여해 약 10억달러의 지원자금을 분담하고 있다.
또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대해서도 미국과 함께 이를 억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독도문제나 한일어업협정문제 등을 둘러싼 양자관계는 바람잘 날이 없다.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명백한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다.
현 정부들어 한국은 실질적 점유사실을 감안해 독도문제를 이슈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이고 일본도 한일간의 화해무드를 의식한 탓인지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독도문제는 언제 또다시 터져나올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지난해 9월 최종 타결된 한일어업협상은 이해관계에 관한 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인접국가간의 갈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일본은 94년부터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인정하는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새로운 어업협정을 체결하자고 채근했다. 일본은 한국이 신 어업협정체결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지난해초 일방적으로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EEZ내에 진입한 한국측 어선들을 잇따라 나포했다.
결국 신 어업협정을 체결했지만 그 여파로 한국에선 김선길(金善吉)해양수산부장관이 경질되기도 했다.
문화 체육분야에서의 한일관계는 지난해 일본대중문화 개방조치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국은 수교 후 일본과의 체육교류는 정상적으로 진행시켜왔으나 국민정서와 대중문화사업의 취약성을 감안해 대중문화개방을 계속 거부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족쇄가 부분적으로 풀림으로써 한일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는 한일 양국이 화해와 협력의 21세기로 나아가는 첫발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관계에는 여전히 ‘명(明)’과 ‘암(暗)’이 공존한다. 과거사 문제, 특히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양국간의 완전한 관계정상화를 저해하는 요소다.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87년 이후 “65년 수교 당시 모두 끝난 문제로 일본 정부는 법적 배상의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부상하자 95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설치하고 정부가 아닌 민간차원에서 1인당 200만엔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군위안부의 징발이 일본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만큼 마땅히 일본 정부가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한국측 주장이고 국제사회에서의 보편적 인식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도 양국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일본은 45년 패전 이후 ‘평화헌법’과 ‘전수(專守)방어원칙’을 유지해 왔지만 점차 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듯한 분위기다.
북한 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계기로 우경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일본 각료들의 종전기념일(8월15일) 야스쿠니신사 참배계획이나 기미가요와 히노마루의 부활은 한국민의 머릿속에 ‘제국주의 일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
다행스럽게도 김대중정권 출범 이후 양국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다. 지난해 9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을 계기로 과거보다 미래를 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는 등 대한해협에는 전례없는 훈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양국 국민의 과거에 대한 인식에는 아직도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 불행했던 과거사를 딛고 두 나라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을 향해 함께 나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지적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對日 청구권자금?▼
65년 한일협정체결과 함께 일본이 제공키로 한 청구권자금은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등 모두 5억달러. 이 돈은 10년에 걸쳐 분할 제공됐다. 유상 2억달러는 연리 3.5%의 공공차관 형식으로 제공됐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 36년에 대한 보상금 성격의 이 돈은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헐값에 민족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도 많았다. 그러나 이 돈이 60년대 경제개발의 초석을 닦는 ‘시드머니’로 활용된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정부는 당시 청구권자금 특별회계를 설치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각종 사업재원으로 이 돈을 활용했다.
광공업 분야에 가장 많은 2억7798만달러(55.6%)가 사용됐고 나머지는 △사회간접자본 8995만달러(18.0%) △농림업 3885만달러(7.8%) △수산업 2717만달러(5.4%) △과학기술개발 2012만달러(4.0%) △기타 4585만달러(9.2%) 등에 사용됐다.
민간인에 대한 배상은 75년에야 이뤄졌다. 정부가 경제개발 우선사용 원칙을 적용한데다 청구권자금이 분할 제공된 때문이었다. 정부는 71년과 72년에 민간인들로부터 신고를 받아 75년 10만3000여건에 대해 95억원을 지급했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