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김대통령은 “이제는 시장이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라고 규정했다. 시장이 재벌해체를 요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한국경제의 진로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선언이다.
하지만 시장 현실은 한두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김대통령의 규정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시중 금융자산이 재벌계열 증권사 투신사 등에 집중돼 재벌의 금융지배가 심화되고 있다. 고학력에 능력있는 인력일수록 중소기업을 외면하고 재벌 대기업으로 몰려드는 경향도 여전하다. 다수 국민이 재벌에 부정적인 인식과 재벌에 의지하는 경제적 선택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재벌의존적 시장구조를 바꾸는 것이 당면과제임을 잘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재벌을 대체하는 생산공급자 및 고용창출자를 형성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김대통령의 이번 재벌개혁 선언에는 분명히 시대적 요구가 담겨 있다. 재벌의 탄생은 경제개발시대 고도성장전략이 낳은 하나의 선택이었다. 또한 재벌이 ‘한강의 기적’을 낳은 견인차였음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십여년 전부터 재벌중심 경제의 폐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정권은 재벌개혁에 실패했다. 그리고 재벌들은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맹신에 사로잡혀 국제통화기금(IMF)사태라고 하는 자신들의 비극이자 한국경제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재벌이 나라경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를 마감해야 하는 이유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진행중인 대우사태가 잘 말해준다.
문제는 대안이다. 어떤 방법과 내용으로 국가 성장잠재력을 유지 확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구조와 산업구조를 구축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이에 대해 정부는 눈에 보이는 비전과 섬세한 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중산층중심 경제’가 제시되고 있지만 막연하게 ‘재벌 아닌 것’ ‘재벌적이지 않은 것’ 몇가지를 예시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당장의 현실로, 잘못하는 기업을 응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잘하는 기업이 더 잘하도록, 경영의 성공신화가 많이 탄생하도록 법제도 시스템 그리고 행정서비스로 뒷받침하는 정부가 돼야 한다. 만약 정부가 기업과 산업을 직영하듯이 송두리째 장악하려고 한다면 이는 재벌의 경제지배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위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정부는 또 개혁대상인 재벌에 대해서도 파괴적 해체가 아니라 발전적 개편이 가능하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대체기업 육성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물론 이에는 재벌 자신들의 자발적 환골탈태 노력이 반드시 맞물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