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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이낙연/다시 '개척시대'라는데…

입력 | 1999-08-18 19:17:00


미국에 신판 골드러시를 일으킨 서부 실리콘밸리가 정치의 중심으로 성큼 다가섰다. 정치에 거리를 두고 기술개발과 비즈니스에만 몰두하던 예전의 실리콘밸리가 아니다. 특히 내년 11월 대통령선거는 실리콘밸리의 행동방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벌써부터 실리콘밸리는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워싱턴 정가로 발신하고 있다. 벤처기업인들은 유력 예비후보들과 손잡고 자금을 후원하며 요구를 관철하고 있다. 예비후보들도 실리콘밸리 쟁탈전에 나섰다.

예비후보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지난달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실리콘밸리를 방문했다. 뉴욕타임스의 분석처럼 민주당 앨 고어 부통령의 정치적 지반을 잠식하기 위해서였다. 고어는 상원의원 시절부터 정보화기반 확충에 정치생명을 걸었다. 92년 대선 때도 고어는 빌 클린턴과 함께 맨먼저 실리콘밸리를 찾아 정보화에 대한 관심을 과시했다. 지금도 고어는 실리콘밸리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부시는 고어의 지지기반을 성공적으로 잠식했다.

실리콘밸리는 부시에게 박수갈채와 85만달러를 안겨주었다. 이 돈을 포함해 부시는 지난달까지 3700만달러를 모금했다. 고어의 모금액 1750만달러의 갑절을 넘는다. 부시는 현지 기업인들의 요구를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정부’와 규제철폐 세율인하가 그것이다.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컴퓨터기술자의 미국이민 허용상한선을 확대하라는 요구도 강하다. 부시는 그것을 약속했다. 부시는 “실리콘밸리는 미국정신의 일부분”이라며 “이곳은 새로운 기술뿐만 아니라 도전과 창의와 아메리칸 드림을 보여준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특히 “나는 늘 소송보다 혁신 편에 서 있다”는 발언으로 갈채를 받았다.

‘소송보다 혁신’은 Y2K 관련소송이 쏟아질 것이라는 실리콘밸리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미 텍사스에서 부시는 Y2K가 곧 소프트웨어 제작자의 책임은 아니라는 조례를 제정했다. 석유의주(州)라 불리는 텍사스에서도 하이테크 분야의 고용창출이 석유산업의 그것을 능가한지 오래다. 실리콘밸리는 부시의 연설뿐만 아니라 그의 실적까지 평가한 것이다.

일본에서 영어도 공용어로 쓰자고 주창한 미국통 언론인 후바나시 요이치(船橋洋一)는 실리콘밸리의 변화와 부시의 대두를 새롭게 해석했다. 미국정치가 ‘변호사 시대’에서 ‘개척 시대’로 옮아가는 신호라는 것이다. 이제는 가해자―피해자 게임에서 벗어나 자기의 위험부담으로 황야에 도전해 금맥을 찾자는 서부개척시대에의 희구가 미국사회와 정치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상징이 ‘소송보다 혁신’이다.

한국정치에서는 세대전쟁이 십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해묵은 색깔논쟁까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은 여전히 뒷전이다. 그렇게 정치가 개미 쳇바퀴 돌 듯한다. 모든 분야에서 세계최강의 자리를 굳힌 미국에서도 정치가 ‘개척시대’로 돌아간다는데 한국정치에는 그런 활력과 지향이 없다.

정치인들에게 변화를 주문하는 것은 공허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르고 닳도록 누리겠다는 정치인들은 자기가 활력과 지향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누구보다도 정치적 도전자들이 부끄러워해야 옳다. 지향과 열정은 역시 도전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낙연naky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