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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담론]마돈나의 'Like A Virgin'

입력 | 1999-08-30 19:16:00


《세기말의 문제들은 세기말로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세기로 이월된다. 금세기 ‘인물들’이 내놓은 상징적인 말들이 우리 시대를 어떻게 함축하고 있는지를 살펴 새천년을 전망한다. ‘철학박사 김형찬기자의 밀레니엄 담론(談論)’은 화두들에 숨어 있는 철학적 의미를 중심으로 시대에 대한 다양한 인문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배꼽'을 성적 기호로

‘당신의 손길이 처음으로 나에게 닿는다면…당신의 심장이 내 가슴 옆에서 고동친다면…처녀처럼…’.

‘처녀처럼’. 미국적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온 몸을 치장한 마돈나가 84년 내놓은 노래의 제목이자 가사에 등장하는 말이다. 이 말은 세기말 성(性)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는 한편 새로운 세기에 ‘성이 흘러갈’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처녀처럼’은 현재진행형이다.

▽‘배꼽’의 화두와 진화론〓마돈나는 성적 이미지를 스스로 창출해 냈다. 성적 기호는 엉뚱하게도 ‘배꼽’이었다. 마돈나는 또다른 ‘부끄러운 부분’ 배꼽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한 것이다.

★'막' 둘러싼 논란 종지부

인간은 왜 배꼽을 감춰왔을까? 그럴싸한 학설 가운데 하나가 ‘털없는 원숭이’로 유명한 영국의 동물행태학자 데스먼드 모리스가 ‘맨 워칭(Man Watching)’에서 제시한 것이다. 모리스는 ‘털이 없이 직립한 상태에서 태어날 때의 상처가 드러나는 데 대해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배꼽을 가리려 한다고 설명한다.

배꼽은 포유류의 증거다. 인간은 포유류지만 ‘포유류’로 분류되기를 싫어한다.적어도 ‘포유류+알파’이고 싶어한다.

인도여성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배꼽. 마돈나가 ‘치부’를 훌륭한 ‘성적 도구’로 진화시킨 것은 나오미 캠벨과 데미 무어가 만삭의 몸으로 누드모델이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처럼〓확실한 것도 “∼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현상에 대해 기성세대의 비판이 가해진지 오래다. 미국어린이도 습관적으로 ‘It’s like…(∼인 것 같다)’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마돈나의 ‘처녀처럼’. 여기서의 ‘처녀처럼’은 ‘처녀가 아닌데 처녀처럼 행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성에 의해 아름다움이나 처녀 여부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처녀’가 된다는 뜻이다. ‘Like a virgin〓I am a virgin’인 셈이다.

이같은 등식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마돈나를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확립한 인물로 꼽는다. 여권론자들은 ‘질의 입구를 막고 있는 탄력성 있는 점막’에 불과한 처녀막이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메커니즘’으로 기능해 왔다고 순결성 논리를 비판해 왔다. 마돈나는 ‘처녀처럼’의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막’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이다. 마돈나는 ‘상처’를 딛고 새출발하는 모습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항상 처녀’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했다.

마돈나의 ‘배꼽’과 ‘막’의 문제는 데미 무어와 나오미 캠벨이 ‘자각해’ 몸으로 보여 준 ‘모성과 여성성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는 주장과 같은 흐름이다.

마돈나식 관점은 새로운 세기에 예견되는 여성의 파워와 함께 가속화할 성 개념 자체의 해체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관심거리다. 21세기는 그렇게 우리 속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다.

★육체의 '존재성' 인정

▽마돈나와 주자학(朱子學)〓마돈나에게 한국 사회의 ‘처녀의 윤리’를 들이댄다면 그건 살인이다. 14세기 이래 동아시아를 지탱해 온 주자학의 윤리는 이미 청나라의 철학자 대진(戴震)으로부터 비판받았다. 하늘의 이치(理)를 따른다는 명목 아래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통제하는 주제학의 윤리란 ‘하늘의 이치를 빙자해 사람을 죽이는 윤리’란 것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표되는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 불합리한 욕망의 덩어리인 육체 자체를 ‘존재’로 인정하는 ‘몸의 담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 외면

정신 사납게 복잡한 세상을 깔끔한 윤리 ‘체계’로 정리해 이해하고픈 것은 인간의 희망사항이지만 체계의 완결성 추구라는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 경우 ‘체계’ 자체의 발전논리에 따라 경직된 자기 체계의 붕괴에 이르는 것은 굳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 보드리야르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역사가 가르쳐 준다.

문제는 남는다. 성적 욕망 역시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성적 욕망은 사회적 위치나 책임을 망각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를 압도할 수도 있는 성적 욕망을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 처럼 ‘욕망의 긍정’이란 입장에서 찬양할 수만은 없다. 성적 욕망의 충족은 사회적 권력과 부에 따라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성적 욕망에 대한 분별없는 긍정은 이미 불순하다.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