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옛 유고) 사라예보 태생인 에밀 쿠스투리차. 지금까지 만든 영화 6편이 모두 칸 베니스 베를린영화제 등 3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운 ‘천재 감독’이다. 그러나 조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비운의 감독이기도 하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장이기도 한 그의 신작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가 18일 국내 개봉된다. 이 영화는 95년 격렬한 정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전작 ‘언더그라운드’와는 달리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코미디.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마도 20세기의 마지막 전쟁터로 남을 ‘유고 땅’의 서글픈 현실을 위로하는 ‘굿판’이자 그 미래에 대한 소망이 실린 묵직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영화?▼
다뉴브 강가에 정착해 사는 두 집시 집안의 3대에 걸친 우정과 증오, 잘못된 결혼식을 계기로 두 집안간에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 등을 그린 떠들썩한 코미디. 친구를 등쳐먹을 궁리만 하는 사기꾼, 사기에 걸려 치르게 된 결혼식, 식장에서 도망칠 요량인 신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신랑, 죽었다가 갑자기 깨어나는 할아버지들…. 복잡하게 꼬인 인간관계와 난장판이 경쾌하고 빠른 집시 음악에 실려 정신없이 펼쳐지지만 종국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낙천적인 영화다.
▼발칸분쟁과 쿠스투리차▼
쿠스투리차는 95년 50여년에 걸친 발칸반도의 역사를 풍자한 ‘언더그라운드’에서 세르비아남성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데다가 칸영화제폐막식에서 “세르비아를 침략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세르비아의 도살자를 옹호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국내외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쿠스투리차는 연출활동을 중단했지만 보스니아에서 배척당했다. 옮겨간 세르비아에서도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리스정교가 지배적인 세르비아에서 회교도인 그는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충돌했다. 결국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국외자로 남게 됐다.
불안한 정체성 때문일까.그는 “모든 민족으로부터 배척당해도 자유롭고 편견이 없는” 집시를 다뤄왔다.‘집시의 시간’부터 ‘언더그라운드’‘검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집시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애착은 뿌리깊다.
▼해피엔드를 꿈꾸며▼
쿠스투리차는 ‘검은 고양이∼’에서 도저히 화합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사람들을 난장판에 몰아넣고 섞이게 만든다. 수류탄까지 터지는 결혼식이지만 기묘하게도 이 난장판은 모두에게 흥겨운 축제로 변모한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실용주의 노선표방이라면 ‘검은 고양이∼’는 화합의 외침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3대에 걸친 사람들의 우정과 반목 화합은,하나였으나 분열된뒤 불안한 미래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발칸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에 그는 통상 쓰이는 ‘End’가 아니라 ‘Happy End’를 넣었다.이는 고향땅에서 한 번도 ‘해피 엔드’를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갈갈이 찢긴 ‘조국 유고’에 바치는 눈물의 헌사이기도 하다.
susanna@donga.com
▼쿠스투리차 감독의 작품목록▼
▽‘돌리벨을 아시나요’(81년)〓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아빠는 출장중’(85)〓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집시의 시간’(89)〓칸 영화제 최우수감독상*
▽‘아리조나 드림’(93)〓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언더그라운드’(95)〓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98)〓베니스 영화제 최우수감독상
(*표시는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