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도 잘 모르고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는 재일동포가 우리나라에 오게 됐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릅니다.” 무기수로 31년을 일본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지내다 어제 귀국한 권희로(權禧老)씨의 귀국 인사말 중 한 구절이다. 권씨는 귀국 후 기자회견을 비롯해 그동안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애써준 각계 인사를 방문하는 등 한동안 분주한 활동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고국에서 보낼 권씨의 여생은 무기수가 되기 전의 삶과 감옥생활에 이어 ‘제3의 인생’이라 할 만큼 극적인 것이어서 그의 말과 행동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석방소식이 전해진 후 각종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특집 등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측면이 있다.그러나 권씨의 석방과 귀국을 즈음해 국내 일부 매스컴의 보도태도를 보면 권씨의 의중과 다르게 선정주의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권씨 사건의 본질은 일본사회의 한국인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는 그같은 차별이 만든 최대의 희생양 이었다. 그의 희생을 통해 일본사회는 민족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고 나아가 한일 관계를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런 의미를 반추하기보다는 반일감정에 치우쳐 권씨를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측면이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재일동포들은 권씨의 영웅화에 따른 불이익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권씨의 석방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앞두고 한일관계에 맺혀 있는 한 응어리를 푸는 좋은 계기가 돼야 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젠 일본에 한때 지배당했다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그 콤플렉스를 뛰어넘어 미래를 보는 열린 마음으로 21세기를 맞아야 하지 않을까. 권씨는 귀국인사에서 밝혔듯이 우리말도 역사도 모르는 동포일 뿐이다. 고국에서 맞는 ‘제3의 인생’이 편안하면서도 의미있는 여생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 그를 맞는 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임연철ynch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