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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한수산 중편집 「4백년의 약속」

입력 | 1999-09-10 18:36:00


“소설 속의 주인공이 심수관가의 도자기에 개안(開眼)하는 과정은, 바로 제가 그 세계에 눈떠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작가 한수산(53)씨가 중편집 ‘4백년의 약속’(나남출판)을 펴냈다.표제작은 가고시마의 심수관 도예가(家)취재를 통해 정유재란 말기 일본으로 끌려갔던 도공들의 자취와 현재의 삶을 그린 작품.

이밖에 휴전협정후 중립국행을 택한 포로들의 자취를 그린 ‘시간의 저편’등 세편의 중편을 담았다.

“지난해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심수관가 도예전에 앞서 동아일보의 의뢰로 ‘시대를 넘어 민족을 넘어―도혼(陶魂)30년’이라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하게 됐죠. ‘4백년의 약속’도 그 취재의 산물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일간지 기자. 심수관가에 대한 취재명령은 받았지만 ‘일본 냄새가 짙은 도자기’라는 선입견은 쉽게 그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한다. 14대 심수관이 병풍이며 육각정(六角亭)을 지을 나무까지 모국인 한국에서 가져왔다는 사실도 ‘과장된 제스처’로 비추어진다.

막상 그의 마음을 열어젖힌 것은 도자기 자체. 예상치 못한 가운데 마주친 16세기의 조선풍 찻잔이며 12대 심수관이 제작한 대화병(大花甁)은 ‘질식할 것 같은’ 매력으로 그를 압도한다. 주인공은 4백년 동안이나 조선의 피와 영혼을 이어간 이름없는 도공들을 비로소 이해하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도자기는 예술 작품이면서 한편으로 실생활에 쓰여지는 물건이죠. 그 실용성과 예술성의 긴장은 4백년을 면면히 이어옵니다. 그동안 조선 도공들의 후예를 떠받쳐온 예술성의 실체는 무엇인지 비로소 인식할 수 있었고, 그런 인식을 널리 나누고 싶었죠.”

그는 14대 심수관이 사교성과 학문적 토대를 갖춘데다 ‘국적상 일본인이지만 한국적 혼으로 정신을 지키고 있다’는 가문의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는 지난 여름 돌아가신 14대 심수관의 부인 오사코 여사의 명복을 빌면서 올해 가문의 이름을 이은 15대 심수관의 정진을 당부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